대전 서구 둔산 지구. 정부대전청사를 비롯, 시청과 검찰청, 시교육청 등 관공서가 줄줄이 늘어선 거대 '행정타운'이다. 시립미술관 등 문화시설,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상가 그리고 잘 짜여진 도로망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부족할 게 없다. 하늘 높이 솟은 타워크레인과 상가분양 플래카드가 즐비한 도심을 걷다 보면 "행정수도 이전의 최적지"라는 주민들의 설명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하지만 둔산엔 없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도서관이다. 둔산1·2동, 삼천동, 만년동 등 둔산 지구 23만 주민의 책 읽을 공간이 없는 셈이다. 옆 동네 도서관을 기웃거리며 책 동냥을 하거나 호주머니 털어 영혼의 갈증을 채우던 둔산 주민들이 최근 도서관을 짓겠다고 나섰다.도서관 없어 서점서 책동냥 신세
13일 둔산 지구의 한 대형 서점. 평일 오후인데도 서점 안은 분주하다. 책을 고르는 사람보다 귀퉁이마다 자리를 잡고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이 더 많다. 책을 든 아이들은 아예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서점 한쪽에 마련된 유아용 책상에 걸터앉아 벌써 2시간째 책을 읽고 있는 범진(10·둔산초4)이는 "5권짜리 '헤라클레스'를 읽기 위해 매일 서점에 온다"고 했다. 왜 도서관에 안가냐는 질문에 "엄마가 (집에) 없다"는 아리송한 대답. 가장 가까운 유성도서관조차 차를 타고 가야하기 때문에 자기 혼자 가기엔 무리라는 설명일 터다. 진구(10)는 "마을문고엔 다 읽은 책밖에 없어 시시해요. 동화책이 많은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나마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둘은 "자리가 없어서 서서 읽는 때도 많다"고 했다.
주부 김모(33·둔산2동)씨 모자도 이 서점의 독서 단골이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책방은 비좁고 중고생 참고서를 주로 취급하거든요. 꼬박꼬박 책을 사볼 수도 없고 유성도서관이나 갈마도서관은 너무 멀어서 아이(6)와 함께 가긴 벅차요." 그는 아이가 클수록 도서관이 절실하다고 했다. "지난해 지방선거 때 도서관 공약을 내건 분들이 많이 당선됐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고도 했다.
서점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도서관 부지도 마련하지 않은 졸속 개발이다" "대형 서점도 둔산에선 그나마 이곳이 유일하다" 등의 쓴 소리를 뱉어냈다. 한 주부는 "얼마 전부터 부녀회에서 도서관 짓는 운동을 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귀띔했다.
주민이 꿈꾸는 작은 도서관
둔산 주민들의 해묵은 불만은 주민이 직접 나서는 도서관 건립 논의로 무르익고 있다. 7일에는 시의원과 구의원, 부녀회원 등 주민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둔산도서관건립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행정분과위, 건축분과위, 운영분과위 등 세부조직도 구성하고 있다. 아직 시작 단계지만 선진도서관 탐방, 도서 기증, 도서관 운영 자원봉사 등 다양한 주민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13일 경과보고를 듣기 위해 한 식당에 모인 주민들은 둔산지구 입주 10년간의 도서관 없는 서러움을 토해냈다. 소박한 청사진도 내비췄다. 이세희(52·둔산2동)씨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밤늦게까지 옆 동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아들 녀석이 안쓰럽다"며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열람실을 많이 만들자"고 제안했다. 김혜수(47·여)씨가 "어려서부터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우리들이 도서관 운영에도 힘을 보태자"고 덧붙였다.
주민들이 구상하는 도서관은 주민밀착형 작은 도서관. 강태원(50·둔산2동)씨는 "거대한 규모보다는 지역 주민 누구나 다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옆 동네 도서관에선 매주 영화도 상영한대요, 우리 도서관도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 공부방, 어린이집, 영화상영, 주민휴식공간 등 복합문화 공간으로 꾸미면 좋을 텐데…"하는 의견도 있었다.
도서관건립추진위 조신형(대전시의회 의원) 위원장은 "대전에 10개의 도서관이 있지만 14만 명당 1개꼴"이라며 "둔산에 주민밀착형 작은 도서관이 성공적으로 완성되면 대전시 전체로 도서관 건립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서관 운동이 소개되자 다른 동네 주민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일단 추진위는 6개월 동안 주민들의 의견을 종합해 둔산 도서관의 청사진을 구에 제출할 예정이다.
부지·예산확보 등 난제 많아
하지만 주민들의 도서관 건립 운동이 당장 넘어야 할 걸림돌은 부지 확보 등 예산문제. 50억∼70억원에 이르는 건립 예산 전액을 주민 모금으로 충당하기에는 애당초 무리였다. 하지만 성의라도 보태자며 '벽돌 한 장 모으기' 등을 시도했지만, 공공건물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은 현행법상 불법이라는 관의 설명에 그마저 중단됐다.
주민들은 부지라도 시에서 마련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땅한 구청소유 땅이 없는 데다 부근에 살 만한 땅도 없기 때문이다. 구우회 구의원은 "지난해 서구청에서 도서관 부지로 거론한 곳도 협소하고 접근성이 떨어져 투자심의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주민들이 도서관 부지로 꼽고 있는 곳은 소방파출소 부지와 관세청 부지 등 시유지다. 이에 대해 시에서는 도서관 건립이 자치구 사업인 만큼 건축비는 지원할 수 있지만 시유지 양여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시유지를 무상 양여한 선례가 없고 다른 구와의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잘라 말했다.
14일 둔산 주민 10여 명이 유력한 도서관 부지로 거론되고 있는 둔산1동사무소 뒤 소방파출소 부지를 찾았다. 497평 규모의 땅은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엔 나무를 심으면 좋겠네." "놀이방도 꾸며야지." "어린이도서관은…" 저마다 머리 속에 그린 도서관 풍경을 한마디씩 꺼내자 "벌써 다 지은 것 같다"는 우스개 소리가 흘러나왔다.
꼼꼼히 곳곳을 살펴본 주민들은 즉석에서 결의대회까지 열었다. "기왕 모였으니 아예 순번을 정합시다. 자원봉사도 하고 아낀 돈으로 책도 사놓고…" 한 주부가 "도서관 없는걸 한탄만 했는데 사람들이 힘을 모으니 뭔가 되는 것 같아 보기 좋다"며 웃었다. 추진위도 "시유지를 구청에서 산다면 공시지가로 따져 20억원 정도면 된다"며 "구청장 공약인 만큼 늦어도 내년엔 착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삭막한 도심에 꿈을 심는 도서관을 짓겠다는 둔산 주민들의 바람이 따뜻한 봄 기운을 타고 싹을 틔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전=글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사진 최흥수기자
우리나라의 도서환경은 열악하다. 현재 전국에는 400여 개의 공공도서관이 있다. 도서관 수만 놓고 단순비교를 하면 일본 2,600개, 독일 6,300개, 미국 9,000개 등 다른 나라 수준에 턱없이 못 미친다. 인구대비로 따지면 우리나라의 경우 12만 명당 1개꼴로 미국 2만6,000명당 1개, 독일 4,000명당 1개, 핀란드 3,200명당 1개 등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국내 도서관 1인 당 장서 수는 0.47권으로 두 사람이 책을 반으로 나눠 읽어야 하는 형편이다. 미국과 일본은 도서관 1인 당 장서 수가 3권이다.
열악한 도서환경은 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부족과 미흡한 투자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체 공공도서관 자료구입비는 국비와 지방비를 모두 포함해 연간 200억원 정도이다. 이는 미국의 한 대학도서관의 연간 자료 구입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하바드 대학도서관의 1999년 도서관 콘텐츠 구입비는 275억원, 콜롬비아 코넬 등의 대학도서관도 200억 이상을 도서관 콘텐츠 구입비로 쓰고 있다. 인구 800만명을 거느린 뉴욕시는 86개의 공공도서관을 갖추고 있고 도서관 배정 예산도 연간 676억원에 달한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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