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인기 여부는 더 이상 나를 얽매지 못 했다. 유능한 후배들이 마음껏 자기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더 중요했다. '록 월드' 시절, 나는 구내 식당 아주머니에게 "메탈 밴드에게는 밥을 양껏 먹이라"고 주문했다. 체력과 정신의 소모량이 여타 장르보다 월등하게 많은 메탈 밴드의 젊은 멤버에게 그것은 현실적으로 복음이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적절한 보수를 못 주는 터에 밥으로 때우자는 심산도 한몫 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자연스럽게 그곳에는 큰 아들 대철이 만든 그룹 '시나위'를 비롯해 '블랙 신드롬' 등 가장 진보적 색채의 메탈 그룹 10여개 팀이 몰려 번갈아 무대에 올랐다. 그 곳은 그들에게 공연장인 동시에 연습장, 요컨대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었던 셈이다.
관객 몇 명을 두고 힘겹게 꾸려 나왔던 '록 월드'는 1985년 봄 더 이상 적자를 버티지 못 해 문을 닫고 말았다. 1년 뒤 나는 물가 싸고 공기 좋은 서울 외곽지대인 문정동으로 들어 왔다. 거기서 진짜 록의 퇴조를 보며 두문불출하고 있다가 바깥 바람을 쐰 것은 다시 1년 뒤였다.
잠실 체육관에 외국 유명 그룹의 공연이 잡혀 있으니 와서 한 번 봐 달라며 기획사가 보내 온 초청장이 계기였다. 2층에서 무대와 객석을 내려다 보고 있자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록을 제대로 즐기는 문화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년 전에 '록 월드'에서 펼쳤던 시도는 '우물 안에서 만세 부르기'였다. 객석과 무대가 완전 분리된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록 공연이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록의 자유와 해방감을 제대로 누릴 준비가 돼 있지 못 했던 것이다. 내가 꿈꾸던 형태의 록 클럽은 90년대가 제법 지나서야 슬슬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게 돌아 온 것은 경제적 손실뿐이었다.
세 아들은 내게 남겨진 가장 확실한 희망이다. 나는 항상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나를 능가하지 못 한다. 창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등학교 6학년의 대철에게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반주법을 가르쳤더니 얼마 안 돼 둘째 윤철, 막내 석철이도 다 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주법만은 내가 가르쳐 줬지만 아들들이 내 영향을 받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세 아들은 모두 다 나와 같은 로커다. 어려서 보고 들은 것이 음악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록의 기초 하나는 완벽한 셈이다. 그들이 있기에 나는 '홀'이 아니다.
대철은 서울고 재학 시절 록 그룹 '시나위'를 만들었다. 나는 교내 콘서트가 있을 때면 가서 장비를 세팅해 주었다. 그 놈과는 일화가 하나 있다. 고교 2학년 들어 며칠 째 등교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내 일에 바빠 모르고 있었는데, 보다 못 한 아내가 "어떻게 좀 해보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연인 즉, 에릭 클랩튼은 17살에 세계적 기타리스트가 됐는데, 자신은 학교나 다닐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가 찼다.
일단 차를 몰고 판교 시골길을 달렸다. 인적 없는 데에서 차를 세운 나는 "운전을 가르쳐 줄 테니 배우라"고 말했다. 기타만이 전부가 아니다, 딴 것도 많이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집에 왔다. 아들은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고등학교를 마친 대철은 서울예전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그 때만해도 실용 음악과는 없었다.
윤철은 형과 다르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윤철의 방에서 어느 날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 비슷한 게 흘러 나왔다. 서툰 솜씨로 편곡한 것이었다. 고교 시절엔 '복숭아', 'Lizard' 등 자기 그룹을 만들고 2002년 발표된 나의 헌정 앨범 'Body & Feel'에서 리드 기타를 맡았다. 막내는 형들이 모두 기타를 치니 드럼으로 돌았다. 지금은 이은미 등 동료 로커들의 세션맨으로 평이 좋은 모양이다.
우리 부자는 동지다. 2001년 힐튼 호텔 컨벤션 센터에서의 '너희가 록을 아느냐', 2002년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신중현 콘서트'에서 함께 연주해 대를 이은 록 정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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