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이 TV로 생중계된 후 '검사스럽다'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대드는 버릇없는 자식'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그날 젊은 검사들의 언행은 '검사스럽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실망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날 검사들의 행태가 특별히 화제가 된 것은 토론 상대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지 우리가 그런 행태를 처음 보고 놀랐던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우리는 그런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검사스러움'은 검사만의 특징이 아니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젊은 세대가 그렇게 된 것은 삼십여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산물이다. 침묵이냐 저항이냐, 생존이냐 죽음이냐는 선택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기성세대는 대부분 굴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토론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토론을 위한 교육도 훈련도 없었다. 젊은이들은 거리에서 화염병으로 자기 의견을 말했고, 그런 방식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내가 속해 있는 언론계도 예외가 아니다. 선배들은 오랫동안 존경받지 못했고, 후배들은 선배들로부터 충분한 직업적 훈련을 받지 못했다. 군사독재가 끝난 후에도 각종 권력이 언론의 자유와 충돌하고 있다. 경영진이나 선배들은 각종 권력과의 관계에서 불신당하기 쉽다. 그래서 젊은 기자들은 '검사스러운' 행태로 의견표시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대학교수도 같은 경험을 털어놓았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젊은 교수들도 의견이 대립하거나 이해관계가 얽히면 학교측이나 선배들을 향해 살벌한 공격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인신공격으로 상처입은 원로 교수들의 예를 들었다.
이번에 '검사스럽다'고 표현된 행태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개인적으로는 예의 바르고 친밀하지만 일단 집단의 일원으로 공개적인 토론이 벌어지면 '안면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과 검사들의 토론도 공개토론이었기 때문에 검사들이 보다 과감해졌을 수 있다.
다음 특징은 상대가 강할수록 '한방 먹이겠다'는 공명심이 작용하기 쉽다는 것이다. 진실과 거리가 있거나 중요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강도 높은 지적과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한건 올리겠다는 치기가 발동하게 된다. 무례함과 용기를 혼동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중간 간부나 관리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최고 권력자와 직접 거래하겠다는 욕구도 자주 드러난다.
대통령과 평검사 토론에서는 이런 특징들이 골고루 나타났다. 검사들로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행태에 대해 '검사스럽다'는 유행어가 나온 것이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심한 비난이 쏟아진 것은 검사라는 직책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 검사의 책임감을 깊이 새기고 그날의 녹화 필름을 다시 본다면 얼굴 붉히게 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올 것이다.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대화가 그처럼 적나라하게 이루어진 것은 긍정적인 면도 있고 우려할 부분도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 앞에서도 할 말을 할 수 있는 토론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론이나 비판으로 직업정신이 바로 서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을 강도 높게 공격했다고 해서 그가 용기있는 검사가 되리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직업인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과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하다. 외부의 압력이 줄어든다고 해서 검찰의 독립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검사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다 고독하게 자신과 대면할 때 직업정신이 바로 설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곳곳에서 내뿜는 '검사스러움'은 불행했던 역사의 흔적이다. 노무현 정부가 주도해나가는 토론문화가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다. 자유롭되 격조를 잃지 않고, 날카롭되 무례하지 않고, 상대를 설득하면서 설득당하기도 하는 그런 토론문화를 키워나가야 한다. 지난 9일의 토론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검사스러움'도 문제였지만 대통령도 격조를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젊은이들이 토론을 통해 자신의 '검사스러움'을 스스로 발견하고 개선하도록 어른들이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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