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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筆耕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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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筆耕舍

입력
2003.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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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오면, 그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우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당진군 송악면 필경사(筆耕舍) 뜨락 심훈(沈熏) 시비에 새겨진 '그 날이 오면' 제1연이다. 우리 문학사의 대표적 농촌소설 '상록수' 작가가 시를 쓴 사실도 몰랐지만, 피가 튀는 듯한 항일정신에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1901년 서울 출신인 심훈은 3·1운동 때 옥고를 치르고 중국에 유학을 갔다가 귀국해 시 희곡 시나리오 소설 등 모든 문학장르에 정열을 쏟았다. '그날이 오면'을 표제로 한 시집을 출판하려다 일제의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른두 살 젊은 시인은 당진 큰 집으로 낙향한다. 손수 설계한 초가집을 지어 필경사라는 당호를 걸고 소설창작에 몰두한다. 55일 만에 탈고한 소설 상록수가 1935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그는 일약 유명작가가 되었다.

■ 이 작품은 경성농업학교를 중퇴하고 돌아와 농사개량과 문맹퇴치 운동을 하던 장조카 심재영을 모델로 한 계몽소설이다. 여자 주인공은 때마침 이웃 화성군에서 농촌운동을 하다 과로 끝에 숨진 신학교 출신의 최용신이 모델이었다. 고등학교 때 이 작품을 읽고 이광수의 '흙'을 떠올린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리라. 피폐한 농촌을 일으켜 세우려는 봉사정신으로 불타던 주인공들이 끝까지 순결을 지키며 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치는 이야기는 성스럽기까지 하였다.

■ 주말산행 귀로에 짬을 내어 찾아간 필경사는 짚으로 지붕을 이은 옛모습 그대로여서 더욱 반가웠다. 상록수를 쓰던 낡은 책상과 잉크병 펜대 같은 옛 필기구들도 진기해 보였다. 이 유서 깊은 기념물이 그냥 보전된 것이 아니다. 엊그제 이근배 시인의 글을 보니, 1978년 문학기행 때 필경사는 축사처럼 변해 있었다. 며칠 뒤면 헐려 밭으로 변할 신세였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 겨우 철거를 면하였고, 당진군이 관심을 갖게 되어 옆에 상록수문화관까지 생겼다. 우이동 최남선 고가가 헐린 데 이어, 부암동 현진건의 옛집과 원서동 고희동 옛집도 같은 신세다. 그 집들을 헐리게 두고도 서울이라 할 것인가.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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