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부장님! 존함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자네가 김영삼인가? 반갑네. 그리고 박정희 차장도 내가 이름은 많이 들었지. 이 자리에 김대중씨나 김종필씨도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전직 대통령의 회동 자리가 아니다. 분명히 조흥은행에서 한솥밥을 먹는 평범한 은행원들인데 이름이 평범하지가 않다. 전두환(50) 본점 신용관리부장, 박정희(40) 반포남지점 선임상담역, 김영삼(33) 구리지점 당좌계 대리. 이들이 14일 오후 서울 조흥은행 본점 6층 신용관리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대중(40) 뉴욕 조흥은행 조사역과 김종필(41) 충북영업부 부지점장은 사정상 참석하지 못했다.
세 명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인데도 묘한 동질감 덕분인지 금세 친해졌다. 영남대 법학과를 졸업, 77년 입행한 전두환 부장이 말을 꺼낸다. "아마, 자네들도 이름 때문에 여러 일이 많았을 거야. 내 경우에는 '80년 서울의 봄' 당시 욕을 많이 먹었지. 대학생들이 길거리에서 데모만 했다 하면 '전두환 물러가라'는 거야. 그것도 내가 근무하고 있는 조흥은행 옆에서 말야."
박정희씨와 김영삼씨는 1996년 의정부지점에서 같이 일한 경험이 있다. 부산 동래상고를 졸업, 82년 입행한 박씨는 둘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보통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후배로 영삼이가 들어왔어요. 진짜 얼굴까지 똑같이 닮았다고 생각했죠. 그때 손님 중에 노태우라는 분이 있었는데 창구에 오시기만 하면 그러셨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잘 있습니까?'"
동대문상고를 졸업한 뒤 89년 입행한 김씨는 "군 부재자 투표에서 제 이름이 대통령후보 명단에 올려져 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후덕하게 생긴 박정희 차장님과는 사석에서 형 동생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고 말했다. 둘은 지금도 의정부지점 출신 행원 모임인 '전우회'에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고 있다.
전 부장에게는 사연이 더 많다. 입행 당시 조흥은행 야구부에는 김재규(80년대 말 퇴사)씨가 투수로 활약하고 있었고, 입행 동기 중에는 이희성(97년 퇴사)씨도 있었다. "예비군 훈련만 갔다 하면 중대장이 김재규 선배와 저를 한 분대에 집어넣는 겁니다. '장군들은 훈련에서 무조건 열외다'라고도 했죠. 제 호칭도 '장군'에서 어느날부터인가는 '각하'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83년 부천지점에서 전두환 당시 대리는 별단예금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업무 성격상 자기앞수표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조흥은행 도장을 팡팡 찍었다. 수표발행인 도장 찍는 일이 대리 전결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안기부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어른 이름이 시중에 너무 많이 도는 것 아닙니까?" 결국 몇 달 안가 조흥은행 발행 자기앞수표에서 '전두환 대리'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 '특별한' 이름 때문에 좋은 점이 더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고객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이름 때문에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린다는 것. 또한 고객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쉽게 기억하는 것도 영업 측면에서 상당한 이점이라고 한다. "우리 세 사람이 한 영업팀에서 일하면 그야말로 드림팀일 겁니다." 전 부장이 두 후배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다.
이름 말고도 이들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몇 가지 더 있다. 박 차장과 김 대리는 각각 90년과 93년 연지동지점과 면목동지점에서 만난 여행원과 결혼한 사내 커플 출신. 특히 입행 당시 부산에서 홀로 상경한 박 차장은 남들보다 더 어렵게 직장 초년병 시절을 보냈다. "주말이면 갈 데가 없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빙빙 두어 바퀴 돈 다음에 자취방에 돌아가곤 했습니다. 당직 근무도 자청했죠. 빨래도 은행에서 하고…."
전 부장은 2000년 세종대 와인 소믈리에 코스를 수료했을 정도로 와인 애호가. 90∼94년 룩셈부르크 조흥은행 현지법인에 근무했을 때 시간만 나면 와인 산지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 지방을 찾곤 했다. 지금도 집에는 가장 아끼는 79년산 '꼬스떼스 뚜르넬'을 비롯해 100여 병의 와인이 와인냉장고에 보관돼 있다.
"자네들도 이제 와인에 대해 조금씩 알아야 할 나이야. 손님 접대나 선물, 집에서 식사할 때 반주로는 와인이 최고거든. 초보자에게는 포도 단일 품종의 맛을 익힌다는 차원에서 요즘 유행하는 칠레산 '까베르네 소비뇽'을 추천할 만 하지."
3자 회동을 한 지 2시간 여. 다시 각자 근무지로 돌아가려고 일어섰을 때 김 대리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전 부장님, 이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다시 한번 만나시죠." 전 부장이 대답했다. "좋지. 다음엔 내가 술 한 잔 살게. 앞으로 신입행원으로 노무현과 노태우까지 들어오면 금상첨화겠지?"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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