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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 마르크바드 "차선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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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 마르크바드 "차선의 철학"

입력
2003.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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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3월은 속죄의 날 성회수요일이 있어 종교적이다. 그 성회수요일 노 철학자 오도 마르크바드의 명문으로 된 '미래와 시원'이 출간됐다. 이 3월 막 75세가 된 그는 이미 저서 '원칙주의자들과의 이별' '회의적 방법으로 칸트 조망하기'에서 소위 '차선(次善)의 철학'을 소문난 문장으로 갈파했다.세계가 새 것과 속도의 공장이 되어가고 있다. 새 것이란 곧 더 빠른 것과 동의어이다. 이 세계는 지금 힘으로 오인되고 있는 새 것과 속도라는 아양에 찬 사이렌, 그 유혹자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말한다. "1950년대 회오리처럼 몰아 닥친 새 것, 하이데거 철학을 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으로 이겨냈다. 계몽의 변증법은 말하자면 새 것이라는 광풍을 이기는 내 곰 인형, 내 분신, 내 나침반이었던 셈이다."

그의 말은 계속된다. 우리의 삶을 전력을 다해 새로운 것에 적응시키기엔 우리에겐 너무도 시간이 없다. 죽음은 우리가 추구하는 그 새 것, 그 속도보다 더 빨리 들이 닥친다. 더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 시작이라는 것을 시작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시원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삶을 그 중도에서 승차해 참여하고 있으며 중도에서 다시 하차할 수밖에 없는 삶의 숙명적 장치 속에 끼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것과 속도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광기는 위험한 것이다. 우리가 삶을 전체적으로 변화시키거나 아주 새롭게 기초를 쌓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혁명가, 원칙주의자, 이상주의자가 되기엔 죽음은 너무 일찍 들이 닥친다.

칠팔십년 간의 수명이란 유효기간은 이런 새 꿈들을 꾸기엔 지독하게 짧다. 삶의 일회성은 가차없는 것이다. 우리는 재앙 같은 우리의 불완전함, 일회성이라는 인간조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의 그릇인 가정, 언어, 종교, 국가, 축제, 탄생, 죽음, 이 모든 것은 새 것이 아니라 이미 시원으로부터 옛 것이라는 장치 속에 저장돼 우리 곁에 있다.

운명적으로 새로운 것은 급히 옛 것이 되고 그 옛 것은 급히 옛 것을 더 옛 것으로 밀쳐 버린다. 이 급격한 변화 속에서 시원, 즉 옛 것에 대한 인식과 숙련 없이는 새 것의 가치를 판단할 힘이 없고 옛 것을 견딜 수 없는 자는 새 것도 견뎌낼 수 없다.

새 것과 속도의 광풍 속에서 의식의 교란, 신념의 분해 같은 정신적 치매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차선의 철학은 참 구체적 예언이다. 장사치들의 말대로 삶을 '경영'하지 말고 삶을 '살라'는 그의 말도 충격적이다.

강 유 일 소설가 독일 라이프치히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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