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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루브르를 훔친 기사

입력
2003.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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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 드농 필립 솔레르스 지음·박수현 옮김 푸른미디어 발행·1만7,000원

비방 드농(1747∼1825)의 얼굴은 수없이 많다. 탁월한 화가, 외설 혹은 천재 작가, 외교관, 비밀요원,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을 약탈해 현대적 의미의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풍요로운 예술 작품은 대부분 나폴레옹 시대 점령지에서 약탈한 것이다. 놀랍게도, 약탈자는 탐욕스러운 장군이 아니었다. 호기심으로 가득찬 영민한 한 사람이 나폴레옹 군대를 따라 다니며 예술품을 긁어 모았다. 당연히 그는 그것을 '약탈'이 아닌 '수집'으로 생각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박물관 앞에 세워진 유리 피라미드로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드농 관'이 있다. 제 1제정 시대에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을 설립한 도미니크 비방 드농 남작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가 "프랑스 사람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지적한, 역사 속의 한 사람이다.

프랑스 소설가 필립 솔레르스(67)가 쓴 '루브르를 훔친 기사 비방 드농'은 바로 그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가가 쓴 전기'로 전제해서는 곤란한, 진짜 소설이다. 전기를 쓰기엔 드농의 삶은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다. 회고록도 없고 편지도 일기도 없다.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긴 하다. 드농을 기억하는 당대의 사람들이 남긴 길지 않은 글 몇 편. 턱없이 빈약한 자료는 소설가의 문학적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솔레르스는 소설과 에세이, 전기를 넘나들면서 자유로운 저술 활동을 펼치는 한편, 문학 뿐만 아니라 미술과 음악 등 폭넓은 관심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던 비방 드농의 신비한 삶에 이 소설가가 매혹된 것은 당연하다.

"이 이름을 소리내어 말해보자. 비방 드농. 대부분의 독자들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드농? 비방 드농? 비방이 이름이고 드농이 성이라고?" 솔레르스의 기록은 비방 드농의 삶만큼이나 기이하다. 인물의 일대기를 친절하게 들려주는 책이 아니다. 평범한 전기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책을 펼쳐야 한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읽기가 쉽진 않지만 곱씹어 읽을 만한 맛이 있다.

드농은 스물 두 살에 루이 15세의 궁정에 들어가 왕과 교분을 쌓았다. 전격적이었지만 앞뒤 상황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던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비밀스런 외교 임무를 맡았고, 당대의 사상가 볼테르의 집에 머물며 친분을 나누기도 했다. 서른 살에 '내일은 없다'를 썼다. '음란소설'과 '프랑스 산문의 보배'라는 양극의 평가를 받으며 한 세기에 걸친 논란을 빚은 작품이다. 놀라운 재능을 보인 화가이자 판화가이기도 했다.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 치하의 나폴리에서 대사로도 활약했다.

프랑스인이던 그는 프랑스 대혁명기에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5년 여의 평온한 삶을 보냈다.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한 가장 위험한 때에 프랑스로 돌아와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와 가깝게 지냈다. 쉰 살도 더 된 나이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동행한다. 드농은 나폴레옹에게 모든 힘과 재기를 바쳤으며, 나폴레옹은 그에게 예술 장관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점령한 나라에서 그림과 조각을 약탈했다. 그의 수집품 가운데는 파라클레에 있는 묘지에서 가져온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뼈 조각, 몰리에르와 라퐁텐의 뼈 조각,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수염 일부 등이 있었다. 드농은 이 귀한 유물을 모아 루브르 박물관을 만들었고 예술에 대한 식견을 가진 방문객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

역사의 칼이 비켜가기 어려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드농은 늘 위험에서 벗어났다. 루이 15세부터 루이 18세까지, 프랑스 대혁명에서 공포정치까지, 나폴레옹에서 왕정 복고까지 시대의 외줄을 타 온 드농의 곡예는 감탄할 만하다. 예카테리나 대제, 로베스피에르, 디드로, 볼테르, 스탕달, 나폴레옹이 드농과 얼굴을 맞댔다. 솔레르스의 표현대로 그는 "미래의 시련을 의기양양하게 뛰어넘은 과거의 인물"이었다.

솔레르스가 경도된 것은 드농의 비밀스런 삶만은 아니었다. 작가는 그의 발걸음에서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던 역사의 현장을 보았다. 그의 일생은 격동하는 유럽사의 파노라마였다. 작가의 말이 맞다. "역사가 잠에서 깨어나, 그 풍부함과 복합성을 울리게 하지 않는다면 드농에 대해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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