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찬 사진 눈빛 발행·3만5,000원
사진작가 김기찬(65)씨의 연작 사진집 '골목안 풍경'은 아마도 우리 사진사에서 매우 톡특한 작업으로 기록될 것이다. 30년 넘게 '골목'이라는 단일 주제로 각 권마다 100여 장의 사진을 담아 6권의 사진집을 낸 것 자체가 초유의 일이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 범상한 자리로 추락하지 않는 기법, 사진마다 일상 속에 묻어 있는 추억을 불러내는 은근한 카메라 솜씨도 상찬할 대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골목안 풍경'은 이번으로 마지막이다. 그가 사진 작업에 진력이 났거나,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다. 이제는 서울에서 더 이상 사진 찍을 골목이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부터 나의 골목들은 도시 재개발로 밀려나 버렸고, 97년을 마지막으로 중림동 골목까지 그 운명을 다했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사진집은 70∼80년대 찍은 골목 사람들과, 짧게는 3년 길게는 30년 가까이 흐른 뒤 그 사람들의 변한 모습을 주로 담았다. "언젠가 도화동 꼭대기에서 다섯 살짜리 소년을 시내를 배경으로 찍은 적이 있었다. 그 동네가 없어지기 직전 그 소년을 십 년 만에 다시 만나 같은 장소에서 촬영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90년대 들면서부터 오래 전 촬영했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다시 찍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이러저리 수소문해야 했고, 골목이 없어졌으니 골목 그 자리에서 다시 찍은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이번 사진집은 골목안 풍경이라기보다 '세월'이라고 불러야 더 적당할지 모르겠다. 땟국 천지인 얼굴로 골목에서 찧고 까불며 놀던 아이들은 20년 뒤 그만한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 어머니로 컸다. 25년 전에 양은 주전자를 들고 중림동 가파른 골목길을 딸의 손을 잡고 내려가던 젊은 아주머니는 손녀를 둘 둔 후덕한 할머니가 됐다. 중림동 집 시멘트 마당에서 사촌동생을 세수시키던 언니 선자는 22년 뒤, 동생과 거의 같은 시기에 결혼해 똑같이 낳은 첫아들을 데리고 작가의 카메라 앞에 섰다.
짧게 붙인 사진설명도 재미있다. 82년 집 앞 골목에서 강아지를 안고 앉아 있던 남자 아이를 찍고, 9년 뒤 그 아이를 다시 찾아 찍은 작가는 '동네에서 발이 넓기로 유명한 사통팔달 아주머니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아주머니는 나를 어느 다세대 주택 앞에 세워 놓고 집으로 들어가 자고 있던 한 청년을 끌고 나왔다'고 썼다.
세월이 흐른 뒤 빈 자리를 남긴 사진도 몇 장 있다. 세상을 떠나고 없는 사람의 자리를 영정이 대신한 경우도 있고,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6년 후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고만 설명을 붙인 사진도 있다. 만일 김씨가 다음 연작 사진집을 계획했다면 골목처럼 세월 때문에 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으면 족히 한 권의 주제가 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가 60년대 중반 동양방송 영화부에 입사한 뒤 짬 나는 대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기 시작한 골목 사진이 책으로 첫 선을 보인 것은 88년이다. 그 뒤로 제4권까지 그는 2년마다 한 권씩 사진집을 냈다. 그 사진집들은 한결같이 삶이 있는 공간에서 삶을 그대로 찍어내는 가장 '정직'한 사진을 보물처럼 담고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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