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3월14일 민족민주운동가 계훈제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78세로 타계했다. 그는 30대 말에 얻은 폐결핵이 악화해 1995년 이래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계훈제의 만년이 병과 가난으로 채워진 것은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로 산다는 것의 힘듦을 쓸쓸하게 반추하게 한다.계훈제는 평북 선천 출신이다. 그는 좁은 의미의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그지는 않았으나, 일제 말기 학병 징집 거부와 항일 운동 이래 당대의 가장 급박한 정치 운동에 자신을 구속시켰다. 그는 해방기의 20대에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으로서 국립대학안 반대운동을 이끌며 김구의 남북협상을 지지했고, 5·16 군사반란과 함께 맞은 40대에는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파병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동시대의 여느 운동가들처럼 계훈제의 삶도 옥살이와 수배로 점철됐다. 그는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된 이래 세 차례 징역살이를 했고, 1980년의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15개월간 도피 생활을 했다.
60대에 들어서면서 맞은 1980년대 이후 계훈제는 주로 재야 공개운동 단체의 얼굴 노릇을 했다. 그는 1985년 25개 재야 민족민주운동 단체들이 모여 태어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부의장이 된 이래 이 단체의 후신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등의 상임고문으로 일하며 후배 운동가들의 힘이 돼 주었다. 계훈제가 마지막으로 간여한 단체인 전국연합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전신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27개 재야 민주화 운동단체가 모여 1991년 12월에 결성되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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