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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내가 "전원일기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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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내가 "전원일기 주인공"

입력
2003.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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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까짓 거 해보지 뭐. 고작 10평인데 힘들면 사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우면 죽기만큼 어렵겠어?!'일주일 전 아들(산, 9세) 녀석이 주말농장 하자고 조르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귓등으로 들었다. 또래들의 허풍 섞은 자랑에 잠시 솔깃했을 터이다. "농사 아무나 짓는 거 아니다." 핀잔까지 얹어 거절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퇴근하고 오면 숫제 노래를 삼더니, 며칠 전부터는 봄바람 든 아내까지 덩달아 '밭두렁 상추쌈' 타령이다. 휴일마다 피곤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결핍의 성장사를 입에 달고 살아 온 농촌 출신 가장으로서의 체면이다. 그간 '농사 박사'인 양 떠벌려 놓은 게 들통나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아무튼 '산이네' 세 식구의 주말농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4월 초

오전 10시. 봄이라지만 들녘의 바람까지 봄바람은 아니다. 벌써 작업을 시작한 이웃 농장들을 둘러본 뒤 윈드재킷을 여미고, 삽을 들었다. "땅을 깊게 파서 뒤집어줘야(로터링작업) 병해충이 적고, 토질이 좋아져 뿌리도 잘 내립니다." 농장주의 오리엔테이션을 좇아 퇴비를 고루 뿌린 뒤 한 삽 한 삽 뒤집기 시작했다. 산이는 호미, 아내는 쇠스랑을 들었다. 뒤집은 흙 더미를 잘게 부수고, 굵은 자갈을 골라내는 역할이다. "옛날에는 소에 쟁기 씌워서 밭을 갈았지." 자상한 설명에 산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10여분이나 지났을까. 아직 반도 못했는데 민망스럽게 땀이 송글송글. 표면이야 녹았지만 겨우내 얼고 다져진 땅을 뒤집는 게 녹록치 만은 않다. 로터링하고, 쇠스랑으로 밭을 평평하게 고르고 나자 손바닥이 따끔거리고 허리도 아프다. 힘들었던지 아내와 산이 얼굴도 제법 불그레하고, 배도 굴풋하다. "밥 먹고 합시다!"

5월 초

"오늘 상추 따먹는 거야?" "그럼, 충분하지." 사실상 첫 수확이다. 그 사이 주말농장 일이라야 잡초 뽑고 물주는 게 전부였던 터라 다소 싱겁기도 했다. 지난 주에는 제법 장딴지 키만큼 자란 열무를 솎아 즉석 고추장 열무비빔밥을 해먹었지만 공식적인 수확은 이제부터다. 아내는 아침부터 들떠 밑반찬에 도시락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가는 길에 삼겹살도 한 근 끊었다. 씨를 뿌리지 않고 모종을 심은 이웃네는 한 두 주 전부터 농장 곁 원두막에서 삼겹살 파티를 벌여 입맛을 다시게 했었다. 톡톡 떨어지는 치마상추 잎에서 허연 진액이 묻어난다. "이게 진짜배기"라며 아내가 흐뭇해 하고, 가게에서만 보던 상추를 직접 따는 재미에 산이도 신이 났다. 우련한 두엄 냄새가 식욕을 돋구는 들녘에서 먹는 삼겹살 상추쌈 정찬. 과연 꿀맛이다.

달포 전만 해도 휑하던 1,000여 평의 농장은 어느 새 알 듯 모를 듯한 채소들로 초록 물결. 소화도 시킬 겸 이웃 농장 마실을 나섰다. 한 집 건너 '고참' 농군네 참외 넝쿨도 제법 무성하고, 고추와 토마토에 일찌감치 지주대를 세운 집도 있다.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산이의 계속되는 질문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얼렁뚱땅 넘긴다.

6월 어느 날

벌써 한 시간째 잡초와의 전쟁. 일을 핑계로 지난 주말을 지나쳤더니 잡초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온 몸이 땀 범벅이고, 잡초보다 내 허리가 먼저 끊어질 판이다. 쑥쑥 자라주던 깻잎에는 진드기 같은 벌레까지 잔뜩 붙었다. 키운 게 아까워 뽑아버릴 수도 없고…. 제초제에 살충제를 들이 붓는 농민들의 아린 심정을 느낀다.

7월 어느 날

아, 토마토! 이번 주쯤 따면 적당하겠다 싶었는데 그 새 진물러 숫제 바닥에 떨어진 게 더 많다. 그나마 성한 놈 몇 알을 따서 울상이 된 산이를 달래고, 농장주에게 가서 물었더니 토마토는 약간 설익었을 때 따야 한단다. 금세 익고 금세 물러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는 수확 타이밍을 맞추기 어렵다는 것. 쑥갓도 얼마 전 노란 꽃대가 오르더니 시들기 시작했고, 상추 역시 끝물이어서 질기다. 그나마 열무가 체면을 살렸다. 그 사이 벌써 두 차례나 알차게 수확해서 물김치까지 담가 먹었고, 아내는 이웃 집에 몇 손씩 나눠주며 생색도 내는 눈치였다.

8월 말

고추와 깨만 남기고 밭을 모두 비웠다. 이제 일년 중 가장 비중 있는 농사인 김장채소를 심을 차례. 무는 고랑을 따라 파종하고, 배추는 모종을 사다 심었다. 배추 자리는 비닐을 끊어다 멀칭(수분 증발과 잡초 번식을 막기 위해 비닐을 덮는 일)도 했다. 이제 남은 일은 무 싹이 트면 간격을 맞춰 솎아주는 것과 김매기. 이웃 농장은 신선초를 수확하는 곳도 있고, 엇갈이배추가 여무는 곳도 있다. 가지 호박도 탐스럽다. 수확 철이 분산되게 작목을 선택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올해 농사는 여러 모로 아쉬운 게 사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이는 요 사이 여치와 메뚜기 쫓아 다니느라 농장 일에는 관심을 끊은 것 같다.

10월 말

배추 모종 40포기가 자라 아름드리 배추 34포기를 수확했다. 무까지 풍년이어서 승용차 트렁크와 뒷자리까지 그득하다. 이쯤이면 부모님과 처가댁 올 김장 채소는 충분한 셈. 두어 포기로는 가까이 사는 처가댁 식구들과 돼지 보쌈 '추수감사제'라도 벌여야 겠다. 그럭저럭 한 해 농사가 끝났다. 올해는 간신히 넘겼지만 내년부터는 정말 잘할 자신이 생겼다. 내년에는 남부럽지 않게 당근이나 감자 땅콩 등 뿌리채소도 심고, 참외 오이도 지어 볼 참이다. 11월에 수확한다는 고구마도 몇 줄 심어야지. 밭 귀퉁이마다 꽃 한 포기씩 심어보자는 아내의 제안도 그럴듯해 보인다. 벌써 내년 봄이 기다려진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주말농장을 선택하는 데는 얼마간의 발품을 팔아야한다. 이동거리, 교통 편의. 임대료 등을 고려해 서너군데 후보지를 물색한 뒤 직접가보는 것이 좋다. 먼저 주인의 인심을 살펴야 하고(수시 교육은 물론, 농사를 망칠 경우 주인네 수확물을 얻어먹을 수도 있다), 취사나 들놀이를 위한 시설을 따져봐야 한다. 최근 들어 주말농사 인구가 늘면서 농장 대부분이 원두막등을 갖췄고, 개중에는 간이 동물농장ㅇ르 둔 곳도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다. 시일이 촉박하면 지방자치단체나 농협중앙회, 환경운동연합 등을 통해 추천을 받는 것도 무방하다.

주말농사의 관건은 치밀한 영농계획. 텃밭 작물의 파종 및 수확시기를 분산시켜 2모작, 3모작 할 수 있도록 면밀히 프로그램을 짜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재미도 있고, 땅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후보작목을 골라 농장주와 상의한 뒤 확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땅의 토질등에 따라 병해충에 강하고 잘 자라는 작목이 있기 때문이다.

씨앗이나 모종을 공짜로 주는 농장도 있고, 공동구매 형식으로 단체조달하는 곳도 있다. 개별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경우에도 농장 인군엔 꽃가게 모종 가게가 으레 많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파종타이밍이 중요하다. 만일 한 두 주일 늦으면 모종을 사다 심으면 된다. 하지만 반드시 씨를 뿌려야 하는 작목도 있다. 당근이나 무 등 뿌리 식물들이 그렇다. 농기구는 농장마다 대부분 갖춰져 있지만 호미나 물 조리 하나쯤은 구입해 손에 익히는 것이 농사일에 애착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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