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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중산층이 중심 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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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중산층이 중심 잡아야

입력
2003.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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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공원은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겨울이 한 번 지날 때마다 폭발적으로 그 수가 늘어나더니 지난 주말에는 대로의 자동차 행렬마냥 달리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에는 일종의 허영심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건강에 대한 고려도 없지 않았지만 요즘 사회가 요구하는 몸매랄지, 달리는 고통을 이겨낼 능력을 과시하려는 욕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는 것이다. 그런 허영심의 여지가 없었다면 애초부터 달리기의 고통을 짊어질 생각일랑 아예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운동복을 입고 아스팔트 위로 발을 내딛는 순간 허영심은 곧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만다. 단지 허영심을 만족시키려고 규칙적으로 장시간 달리기를 지속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리는 데 익숙해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려면 오랜 훈련 기간을 거쳐야 한다. 10여년 동안 습관처럼 달리기를 해 왔지만 아스팔트 위로 첫 발을 내딛으려면 아직도 매일 새로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달리기가 고통스러운 한가지 이유는 달리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 달린다.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달리기에서도 꼭 맞는 동반자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동반자가 없는 이 고독한 장정에서 달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경쟁자로 설정하고 자신의 한계와 사투를 벌인다. 선수도 관객도 오직 혼자 뿐인 그 싸움에서 허영심이 작용할 여지는 더 이상 없다.

'구별짓기'에서 프랑스의 부르디외가 얘기한 바 있듯이 달리기는 중산층이 즐기는 대표적 스포츠 중 하나이다. 자신의 현 상태를 넘어 서려는 욕망, 그를 위해 현재의 만족을 뒤로 미루려는 태도가 달리기의 정신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자주 이쪽도 저쪽도 아닌 회색으로 비판받는 중산층의 처지와 달리기의 고독함 사이에도 어느 정도 닮은 구석이 엿보인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을 요구받는다는 점에서도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달리기를 선택한 중산층은 이 고독의 고통과 반성의 어려움을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달리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그만큼 건전한 사회가 될 기초가 잘 갖춰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을 매일 경험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중심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달리기 열풍은 중산층의 양적 성장뿐 아니라 질적 성숙까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산층의 중심은 아직 그 뿌리가 여전히 취약한 상태이기도 하다. 사소한 사회적 사건에도 크게 출렁거리는 여론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계절에 따라 달리기 인구도 급격한 변화를 보여 준다. 1970년 불과 156명으로 시작했던 뉴욕 마라톤의 참가 인원이 10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1만 명을 넘어 선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신생 대회에 조차 수만 명의 참여 인원을 헤아릴 만큼 과장된 흥분의 상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건 마치 실질과 무관하게 머리 속으로만 중산층 의식을 가지고 있던 과거의 거품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달리기의 덕목이 조금씩 서서히 쌓아가는 것이라면 연습없이 마라톤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이런 성급함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요소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안정 속에서 꾸준히 개혁을 이뤄 가려면 확고한 자기 중심을 가진 중산층의 형성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묵묵히 아스팔트를 디디며 자기 성찰 속에서 확고한 중심을 잡아 갈 중산층이 자리잡힌 사회를 꿈꿔 본다.

정 준 영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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