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 등의 여파로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경제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다. 해외 한국물의 금리가 치솟고, 환율이 출렁이며, 주식시장에선 '셀 코리아'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안으로는 소비와 투자가 얼어붙은 가운데 물가불안과 주가폭락 사태마저 겹쳐 경제가 총체적 위기로 치닫는 형국이다. 한국경제를 보는 외국인의 시각을 알아보기 위해 11일 미국상공회의소(암참) 윌리암 오벌린 회장과 주한EU상의(EUCCK) 프란스 햄프싱크 회장, 하나알리안츠 투신운용의 오이겐 뢰플러 사장 등 대표적인 주한 외국기업 경영인들을 대상으로 긴급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 내용을 요약한다.
오벌린 美상의 회장
1943년 미국 생/듀퍼대 정치학과/미 남가주대 시스템매니지먼트 석사/미군 지휘관 및 일반 참모대학 군사학석사/현 보잉코리아 사장겸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
햄프싱크 EU상의 회장
1949년 네덜란드 생/네덜란드 미들버그대 사회학과/포윈드(FOUR WIND) 인터네셔널코리아 사장/현 UTS-R& L 아시아지역 사장겸 주한EU상공회의소 회장
뢰플러 하나알리안츠 사장
1961년 독일 생/괴테대 경영학/괴테대 재무금융 박사/홍콩 알리안츠 자산운용 재무책임자/알리안츠 제일생명 자산운용본부장/현 하나알리안츠 투신운용사장
―외국 투자자들이 주식을 팔고 한국을 떠나고 있다. 외환위기 때처럼 '셀 코리아'가 시작된 게 아니냐는 우려도 팽배하다. 외국기업의 CEO로서 한국경제 위기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햄프싱크=주식시장의 팔자 물결은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아치우느라 난리다. 경제불안은 한국만의 특수상황이 결코 아니다. 북한 핵 문제만 하더라도 미디어 등을 통해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한국을 공격목표로 정해 핵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심리적인 공황이 계속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다.
뢰플러=외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은 세계의 수많은 투자처 중 하나일 뿐이다. 리스크가 조금이라도 커지면 돈을 빼내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셀 코리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국이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여전히 많은 장점을 지닌 시장이다. 세계경제가 극심한 침체에 빠졌던 지난해 6%대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을 정도로 기초체력도 튼튼하고 자본시장의 규모나 성숙도도 세계 어느 선진국 못지않다. 단기적으론 부정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 관점에선 여전히 매력적인 시장이다.
오벌린=이라크 전쟁위기 등의 여파로 세계 경제가 하강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일부로서 한국경제가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 핵'이라는 또 다른 리스크를 안고 있다. 해외 발행 한국채권의 금리가 오르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원화가치 하락)하는 것은 어느 정도 국가 리스크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결국 북핵 문제를 얼마나 빨리 해결하느냐에 한국경제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햄프싱크=뢰플러의 의견에 공감한다. 지금 주식을 파는 것에 대해 외국 투자자의 '셀 코리아'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시장에서 주식을 팔고 떠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단기적으로 수익을 올리려는 단기 투자자일 뿐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에 투자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둘을 동일시해서 괜한 위기감을 조장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최근 한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두 단계나 내렸다. 그만큼 한국시장을 바라보는 외국의 시각이 부정적으로 바뀐 것 아닌가.
오벌린=무디스가 등급 전망을 낮춘 직접적 요인은 북핵문제에 대한 불안 때문으로 알고 있다. 다른 평가기관들이 모두 무디스와 같은 견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다. 무디스의 판단은 국가의 안보가 경제에 직결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시장을 볼 때 '국가안보'를 경제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햄프싱크=무디스의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무디스와 달리 다른 평가회사들은 한국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의 경제상황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이다. 무디스가 심리적 요인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아닌가 싶다.
뢰플러=무디스가 등급 전망을 하향조정했다고 곧바로 한국의 신용등급을 낮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제든 깨지기 쉬운 것이 경제와 자본시장의 속성이다. 심리적 공황만으로도 국가경제는 크게 출렁일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심리적 불안이 계속된다면 무디스도 한국의 신용등급을 낮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경제가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려면 어떤 대책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는가.
뢰플러=한국경제는 외부변수 못지않게 국내 신용감소, 소비심리 위축 등 내부문제도 안고 있다. 소비자 신용과 소비의 위축은 성장 둔화요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금리인하와 재정 확대를 통해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3%대까지는 콜금리를 인하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예전처럼 가계대출을 한없이 풀어서 빚으로 소비를 진작하고 내수를 부양하는 방식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빚을 갚지 못해 신용위기가 생기면 경제에 대한 악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정부가 가계대출 규제의 고삐를 죈 것은 적절했다고 본다.
오벌린=내부적인 문제에 대해선 정부가 나름대로 해결방안을 갖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경제위기는 외부적 원인이 훨씬 더 크다는 점이다. 이라크전쟁 위기나 북핵문제가 시장에 존재하는 한 근본적으로 경제난을 극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역으로 이런 외부변수가 해소된다면 경기곡선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방향을 틀 것으로 확신한다. 하루빨리 전쟁위기가 평화적이고도 성공적으로 해결되길 기대할 뿐이다.
―개혁 성향의 새 정부 출범이후 재계에서는 강도 높은 재벌개혁이 시작될 것으로 우려하며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햄프싱크=몸을 움츠리는 사람들은 뭔가 숨길 게 있기 때문이다.(좌중 웃음) 노무현정부가 추구하는 것은 경제 혁명이 아니라 경제 업그레이드 아닌가. 기업의 투명성과 거래의 공정성을 높이는 것은 경제엔 약이다.
뢰플러=전적으로 동의한다.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이나 투명성 강화 등 새 정부가 내세운 경제정책방향은 급진적 변화로 보긴 힘들다. 시장의 투명성이야 말로 해외 투자자들이 가장 원하는 바다. 단기적으로는 부정적 영향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을 보다 튼튼히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벌린=최근 노 대통령이 과천 정부청사로 직접 가서 경제부처 업무보고를 받은 것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는 대통령이 경제문제를 그만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 언론과 일부 외신이 한국정부의 상황인식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잘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한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햄프싱크=경제에선 투명성 못지않게 일관성도 중요하다. 한국에선 공무원들이 너무 자주 바뀌는 것 같다. 담당자가 바뀌면서 관련 법규나 기준도 수시로 변한다. 기업하는 사람 입장에선 예측 불가능이 가장 큰 고충이다. 언어장벽 때문에 불편도 크다.
뢰플러=규제만 해도 일관성이 없는 것들이 많다. 때론 같은 규제에 대해서도 이쪽 부처 다르고, 저쪽 부처 다른 경우 많다. 일관성의 결여는 해외 투자자들에겐 매우 부정적인 요소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한국으로부터 투자자를 빼앗아가고 있는데다 지금처럼 경제가 하강곡선을 그릴 땐 투자유치는 더욱 어려운 문제다.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투자환경을 갖추는 게 급선무다.
오벌린=한국에서 사업하는 외국 경영인들은 일종의 '대상(隊商·캐러반)' 같은 존재들이다. 자국으로 돌아가 투자자들을 한국으로 끌어오는 역할도 한다. 새 대통령이 한국에 진출한 외국기업과 대화를 자주해 가능하면 많은 의견을 수렴했으면 좋겠다.
/정리=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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