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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51>소설가 김 인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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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51>소설가 김 인 숙

입력
2003.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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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의 집에 나무가 있다. 나무는 아이의 탄생목이거나, 아니면 아이의 집안 뜨락에 우연히 뿌리를 내리게 된 그저 흔한 나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처음으로 그 나무를 눈여겨보았을 때 나무의 키가 아이보다도 작았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자기보다 키작은 그 나무를 뛰어넘었다. 키작은 나무를 뛰어넘는 일은 이제 세상에 발 딛기 시작한 아이에게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무언가를 뛰어넘는다는 것, 두 발을 동시에 땅 위로 들어올렸다가 안전하게 착지한다는 것, 그것은 아이가 세상을 알기도 전에, 세상을 정복한 최초의 경험이 되었다. 그리하여 아이는 이제 매일같이 그 나무를 뛰어넘는다.나무가 자라는 속도는 아주 느리고, 아이가 자라는 속도는 매우 빨랐지만 느림의 지속성이 아이를 능가해버리는 것은 순간이다. 나무는 아이도 모르는 사이, 시간도 모르는 사이 끝없이 크고 있었다. 아이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나무는 이미 아이보다 컸고,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는 고개를 젖혀야 그 꼭대기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그 나무는 여전히 어제도 뛰어넘었던 나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스무 살인 아이는 자기 키보다 더 높은 나무를 뛰어넘을 수 있었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는 자기 집 담장보다 더 큰 나무를 뛰어넘을 수 있었고, 서른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자기 집 지붕보다 높은 나무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마침내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이 뛰는 사람이 되었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그리고 아이가 그 나무를 뛰어넘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한, 이 세상에 아이보다 더 높이 뛸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된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언제 읽었던가? 혹시 만화책으로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나는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가 너무도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어른이 된 주인공이 자기 집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외출을 하는 장면은 마치 내가 직접 본 것이기나 한 것처럼 생생하다. 주인공은 미리 준비된 가속의 힘도 필요없이, 도움닫기도 필요없이, 그저 한번 무릎을 구부렸다가 펼 뿐인데, 그 뛰어오르는 높이가 그야말로 눈부시다. 나는 내 집에는 뛰어넘을만한 나무가 없다는 것과, 그 글을 읽을 당시의 내 나이가 이미 너무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애석해 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내 최초의 꿈은 높이뛰기 선수가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얼마나 도달하기 쉬운 꿈인가.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될 터이니.

그러나 나무는 어떻게 자라는가. 또 소년은 어떻게 자라는가.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만이 성취의 힘이라는, 얼핏 교훈적으로만 기억되는 이 이야기에는 높이 뛰는 남자의 고독같은 것은 나와있지 않다. 혹시 당시의 내 나이가 너무 어려, 그것을 읽지 못하였을까. 그랬기가 쉽겠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이 지나, 담장을 뛰어넘어 외출하던 남자만큼이나 내가 나이 들었을 때,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그 눈부신 높이만큼이나, 까마득한 슬픔이 되어 다가온다. 눈부신 비상 뒤의 안전한 착지. 남자는 그것을 믿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매번 더 높이 뛴 것이 아니라, 어쩌면 매번 더 깊이 추락한 것인지도 알 수 없으니.

내게 소설이란 이렇다. 안전한 착지에 대한 안타까운 희망과, 까마득한 추락에 대한 불온한 욕망, 그 아슬아슬한 경계. 매일같이 나무를 뛰어넘는 남자처럼 나 역시 그러한데, 내 나무는 하지 못한 말들이거나 할 수 없었던 말들이고, 그에 대한 모멸이거나 굴욕이다. 이봐요, 누가 날 좀 설득해봐요. 그러나 나는 아직 작은 묘목조차 뛰어넘어본 적이 없다. 이러한 사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나무를 뛰어넘기 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를 설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숨겨놓은 말들, 하지 못한 말들, 그 말들이 나를 설득하고 나를 위로한다. 자,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는 뭔가 할 말이 있지 않은가요.

늦은 나이에 운전을 배워서는, 차를 몰고 다니는 재미에 톡톡히 빠져있던 무렵의 일이다. 밤 열시쯤 강남에 있는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자유로를 달리고 있었다. 자유로에 진입하기 전에 주유소에 들렀다가 안전벨트를 풀었는데, 그걸 다시 채우지 않았다는 걸 자유로 한복판에서 깨달았다. 안전수칙을 지키는 것이 목숨같았던 초보 시절이었다.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만 돌려 안전벨트를 끌어당기려는데 당연히 거기에 있어야 할 안전벨트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당황했고, 바로 그 순간에 핸들마저 놓쳐버렸다. 내 차는 몇 개의 차선을 왔다갔다 하다가 급기야는 유턴을 해서 편도 5차선의 갓길에 거꾸로 세워졌다.

그때 죽음은 내 곁 어디쯤에 있었을까? 1차선을 달리던 차가 순식간에 5차선 바깥의 갓길에, 그것도 거꾸로 서게 될 때까지, 죽음은 그 농담 같은 순간을 즐기고 있었을까, 아니면 나와 함께 핸들을 쥐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나는 다치지도 않았고, 내 차 역시 긁힌 자국 한 군데가 없었다. 나는 갓길에 멈춰선 채로,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가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차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가 자유로 한복판의 갓길에 차를 거꾸로 세워놓은 내 신기한 재주를 놀라워했을 것이다. 불현듯 수치심이 덮쳐왔다. 이런 순간에 어떻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곧바로 떠올랐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수치심을 느끼는 나를 경멸했고, 그러자 타인에 대해서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지독한 수치심이 들었다.

는 사람들에게 그 순간에 느꼈던 수치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 역시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운전을 하는 누구나 죽을 뻔했던 경험들이 있었다. 나는 내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혹은 바로 그 순간부터 각별해져서 한동안은 영 남의 일같이 들리지 않게 된 방송 뉴스의 사건사고 소식을 꼼꼼히 새겨 들으면서, 내가 겪은 한 순간의 경험이란 게 별 거 아니란 걸 알게 되었고, 내가 설명하지 못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짐작했다. 나는 핸들을 놓친 게 아니라 놓아버렸어요. 내가 놓아버렸다구요. 술 취한 누군가의 나른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지요.

매일 같이 나무를 뛰어넘어야 하는 한 사내의 고독이나, 고속도로에서 차의 핸들을 놓아버리고 싶은 누군가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나무와 시간은 어떻게 이해를 할 수가 있겠나. 나는 문학을 왜 하는가. 이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도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문학은, 내게 있어서는 말을 거는 방식이다. 쭈뼛쭈뼛 말을 걸고, 저 쪽이 들어주든 말든, 지루하고도 길게 중얼중얼 혼잣말을 한다. 마침내 그 혼잣말이 내가 생각해도 좀 지겨워질 즈음에는, 눈치를 보면서 한 번 물어볼 뿐이다. 당신도 나와 같은가요? 그러나 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말해주세요. 속속들이 너무나 달라서 살의나 욕정을 느낄 수도 있을 만큼, 그렇게 사랑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어깨에 매달려 담장을 같이 뛰어넘지요. 그러고 보면, 문학은 내 삶의 연기(演技)인가. 눈부신 비상과 안전한 착지 사이. 혹은 욕망과 추락 사이….

● 연보

1963년 서울 출생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상실의 계절' 당선 등단

1987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소설집 '함께 걷는 길' '칼날과 사랑' '유리구두'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장편소설 '핏줄' '불꽃'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긴 밤, 짧게 다가온 아침' '그래서 너를 안는다' '시드니 그 푸른 바다에 서다' '먼 길' '그늘, 깊은 곳' '꽃의 기억' 등

한국일보문학상(1995) 현대문학상(2000) 이상문학상(2003)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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