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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20) 라이브 록 클럽에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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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20) 라이브 록 클럽에의 도전

입력
2003.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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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낯설기 짝이 없었던 3인조 그룹인데다 고집스런 정통 록이었다는 이유로 앨범 '세 나그네'는 사장될 판이었다. 나는 옛 동료 킹박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 "내 작품이다. 시중에 안 내도 좋다. 몇 장만 찍자."매달리기 전법이 통했던걸까, 그는 내말대로 해 줬다. 그런데 레코드 자켓이 완전 흰색이었다. 아무 인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 기 찬 것은 아예 발매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사장될 운명이었다. 그 일로 그 자의 진심을 파악한 나는 사연 많았던 킹박과 손을 완전히 끊었다.

당시 뚜렷이 할 일이 없던 우리는 뮤직 파워에 있었던 박점미가 마침 내게 독집 제작을 도와 달라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응했다. 동시에 나는 앨범 '세 나그네' 발매를 꾸준히 모색했다.

먼저 1983년 서라벌 레코드에서 나왔던 '세 나그네'는 혜은이의 건전가요 한 곡을 제외하고 모두 8곡의 내 노래와 기타 연주가 들어 있다. 초판은 비매품으로 찍었으나, 재판은 매장용으로 찍었다. 반응을 자신하지 못 해 아슬아슬했던 당시 심정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1984년 나는 알고 지내던 이태원 사람들과 동업 형태로 이태원에 7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라이브 카페 '라이브'를 만들었다. 연일 쏟아지는 음악은 트로트 아니면 댄스 뮤직 뿐이었던 당시에 대한 나의 항거였던 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업계에서는 '뽕락'이라는 말로 통한 댄스용 록 음악에 대한 나의 직접적 행동이었다. 특히 당시 '라이브'란 말 자체가 일반에게 너무 생소하다며 업주는 투덜댔다.

그 같은 상황은 진정한 라이브 문화가 꽃 필 수 있는 클럽에 대한 욕구를 더 채찍질했을 뿐이다. 현장에서의 몰지각뿐 아니라, 방송에서 무차별 난사되는 저질 음악의 홍수를 저지할 수 있는 실질적 방파제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업주측에서 의구심 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 하면서도 내 말을 따른 것은 나를 놓치기 싫었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태원 일대를 통틀어 유일의 라이브 록 클럽이었던 그 곳에 나만 무대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뮤지션들도 즐겨 섰다. 록계에서는 이중산(기타), 김도균(〃)이 단골로 섰다. 전인권이 독특한 색깔의 보컬로 데뷔했던 곳도 바로 거기다. 또 재즈계에서는 정성조(색소폰), 유복성(타악기), 신관웅(피아노) 등 중견들이 무대를 즐겨 갖는 곳이됐다.

내 온몸은 이미 악기가 돼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연출도 없지만 무대와 객석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몸을 통해 발산해 내는 열기, 그것은 록 무대만이 갖는 생의 희열이다. 무대 밖에서는 내성적인 나이지만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 대는 관객 앞에서 나는 초능력자가 된다. 평소 내성적이던 나는 무대가 좁아라 뛰어다닌다. 그 때면 나는 음악 연주자가 아니라 제사의 집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중현과 엽전들'의 LP에서 음악 평론가 최경식씨가 썼던 말에 공감한다. '판소리 창에 있는 해학과 자학의 피가 서구의 12음계를 통해 살아 온다'는 말이었다.

다양하고도 생동감 있는 음악 메뉴가 차려지자 '라이브'는 문을 연 지 한 달 안에 입소문을 타고 손님들이 몰려 들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진짜 록(real rock)의 시대였던 1960∼70년대식의 라이브 무대에 진한 향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3개월 하고 나자, 건물주가 "이제 궤도에 오른 만큼 내가 직접 운영하겠다"며 나더러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손을 털었는데, 그 후 1개월만에 그 곳은 문을 닫고 말았다. 내가 안 나가니 후배들이 출연하지 않게 된 때문이다.

예상밖의 반응에 자신을 얻은 나는 이태원 소방서 옆의 3층 짜리 건물인 태평극장을 빌려 또 다른 라이브 록 클럽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록 월드'. 그것은 국내 최초의 록 전문 공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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