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퇴라는 말에는 후진에게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권하는 배려와 겸양의 미덕이 깔려 있다.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용퇴는 인위적인 물갈이나 강압적인 밀어내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물 흐르듯 자연스런 세대교체도 떠날 때를 아는 이들의 결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물러날 때를 알고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기 마련이고 그들의 귀거래사(歸去來辭)는 늘 감동적이다.
새 정부 들어 고위 공직자의 용퇴가 유행이다. 그러나 어째 물러나는 모양새가 진짜 용퇴 같지 않다. 모든 부처가 개혁과 쇄신이란 이름의 인위적인 밀어내기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주 검찰에서 3명의 고검장이 옷을 벗은데 이어 10일에는 임기를 보장 받은 검찰총장마저 퇴임식을 치렀다. 새로 검찰총장이 임명되고 대대적인 검찰 인사가 11일 단행될 예정이라니 검사장(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 10여명이 또 한꺼번에 옷을 벗을 것이 분명하다.
8월까지의 임기보장과 교체 사이에서 고민하던 공정거래위원장도 사표가 수리됐다. 교체설이 나올 때마다 "내 임기는 아직 남았다"는 말을 거듭하던 임기직 수장들의 모양새가 말이 아니다. 모두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개혁적 인사를 기용해야 한다는 청와대의 강력한 희망에 따른 것이다.
검찰총장은 "검찰 수뇌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대통령의 직격탄을 맞고 낙마했고, 공정위원장은 대통령 인사보좌관의 언론을 통한 우회 사퇴 압력에 굴복해 물러났다. 역시 임기직인 금감위원장도 '개혁성이 모자라' 옷 벗을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주요 임기직 수장 중에서 감사원장과 소청심사위원장, 한국은행 총재만 남는 셈이다.
금감위와 공정위 직원들은 "청와대가 임기보장 약속을 번복하는 바람에 위원장들이 제때 거취 표명을 하지 못하고 불명예 퇴진하는 것 아니냐"며 원망스럽다는 표정이다. 열흘 가까이 조직 운영에 혼선이 빚어지고 업무 공백이 생긴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차라리 약속이나 말 것이지, 지키지도 못할 임기제 보장 발언으로 사람만 바보 만들었다"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감사원장이나 한은 총재의 임기는 보장하면서 경제부처의 두 핵심 임기직을 지켜주지 않는 '이중잣대'를 설명하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대통령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알아서 물러나야 한다는 식의 풀이는 법률로 임기가 보장된 공직자의 퇴진을 설명하기엔 너무 구차하고 유아적이다. 임기제는 정권교체나 외부의 압력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이를 훼손하는 것 자체가 외부의 압력인 셈이고 약속을 깨는 일이다. 입만 열면 개혁을 외치는 새 정부가 역대 정부의 '법 따로 인사 따로'식의 구태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국정철학을 같이 할 자기 사람을 쓰고 싶은 욕심도 무턱대고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임자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고, 실정법과 금도(襟度)를 넘어서는 개혁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2대 정권에 걸친 임기직 인사가 있어 개혁이 어렵다는 생각은 자신감의 결여거나 논리의 비약이다.
꽃샘추위가 봄기운을 막을 수 없듯, 바뀐 시대에서 개혁의 대세를 거스를 '간 큰' 공직자는 없는 법이다. 임기제를 보장하면서도 예정된 개혁을 이뤄나가는 포용력과 여유를 가진 정권을 보고 싶다.
이 창 민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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