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 신임 행정자치부 장관은 취임 일주일이 넘도록 아직 친구집 더부살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줄곧 경남 남해 고향마을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그는 서울 한 복판 정부세종로청사에 입성했지만 서울은 여전히 객지인 셈이다. 이는 김 장관만의 사정은 아니다. 권기홍 노동부장관, 허성관 해양수산부 장관,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정찬용 인사보좌관 등 상당수 새 정부 장관과 대통령 참모들이 서울에는 거처 조차 없이 순전히 지방에 뿌리를 뒀던 인사들이다. 중앙부처 한 공무원은 "지방에서 점령군이 대거 올라온 형국"이라고 표현했다.'지방 세력의 대거 중앙 입성'의 현상 뒤에는 유사 이래 '구심력'만 가진 채 중앙으로만 빨려 들던 한국의 권력 흐름을 돌려놓으려는, '지방 분권 운동'이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원심력'은 본격 작동을 시작했다.
호랑이 굴로 뛰어든 분권론자들
2001년 9월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으로 대학교수, 시민단체 관계자 등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지방에 권한과 돈, 인재를 넘겨줄 것을 "불균형 발전구조를 청산하고자…"로 시작하는 선언문을 통해 자못 엄숙하게 요구했다. 당시 참여자는 "독립 선언에 참여한 심정이었다"고 토로했다.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2,800여명이 참여한 당시 서명엔 지금은 낯익은 이름이 된 이들이 여럿이다. 대통령직 인수위 정무분과 간사를 맡았던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지식인 선언 당시 서울 경기 대표였고,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위원을 지낸 성경륭 한림대 교수, 그리고 이정우 실장도 당시 교수 자격으로 참여했다.
학계만의 논의, 지자체의 각개약진에 머물던 '지방분권'은 국민운동 차원으로 승화했고 권력을 달라는 지방의 요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시민운동과 지자체, 지방대학 등이 결합했고, 대통령 선거 공간을 만나 요원의 불길이 됐다. '지방분권국민운동'이라는 전국 조직이 꾸려졌고 대통령 후보들로부터 '지방분권 협약서'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출범. 강단의 분권론자들은 호랑이(지방분권)를 잡기위해 속속 굴(중앙)로 뛰어들었고 꾸준히 지방분권 운동을 해온 김두관 전 군수는 실무 장관이 됐다.
포항시장 시절 분권을 강하게 주장했던 박기환씨가 지방자치담당 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했고 이정호 부경대 교수도 인수위 전문위원을 거쳐 이 분야 업무를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원혜영 경기 부천시장, 정윤재 민주당 부산사상을 지구당위원장 등 노대통령의 외곽 참모들도 이 분야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분권은 국가 어젠다로 자리 매김했고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아직은 산 넘어 산
"지방분권? 지금이야 대통령까지 나서서 얘기하니까…. 하지만 그거 어디 되겠소." 앞으로 지방분권 관련 실무를 담당할 행자부 공무원들이 사석에서 털어놓는 얘기다. 중앙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들던 '옛날'을 더듬으며 현재의 지방자치제도에 대해서도 불만을 털어놓는 관료들로서는 '지방분권'은 받아들이기 힘든 그 무엇이다. 한국인들에게 지방분권은 1,000년만의 권력 대이동이다. "국가를 근본부터 재구성하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황한식 부산대 교수)이다.
지방분권을 부르짖는 이들도 잘 알고 있다. 5년 전 김대중 정부도 '논리적'으로는 지방분권에 동의했다. 지방이양추진위원회란 것도 만들었다. 하지만 관료들은 사보타주로 맞섰고 대통령도 더 이상 추진할 의지가 없었다. 이재용 전 대구 남구청장은 "본격 추진이 되면 관료 정치권 중앙언론의 반대가 만만찮을 것"이라며 "대통령 주변에 분권 주창자들이 포진했다고 해서 자연히 이뤄질 것으로 생각하면 착각"이라고 말했다. 지방이 준비 되어있느냐는 문제도 제기된다. 지방분권이 지역 토호세력의 배를 불려줄 것이란 우려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김순은 동의대 교수는 "지방분권은 권한과 함께 책임도 떠맡는 것이므로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방 의회의 활동과 집행부의 방만한 조직운영 등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방으로의 권력 이동은 이제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지방분권국민운동·지자체장협의회… 분권운동 든든히 떠받쳐
대통령 주변에 포진한 지방 분권 세력과 함께 분권 운동을 아래에서 든든히 떠받치는 그룹은 지난해 11월 만들어진 '지역균형발전과 민주적 지방자치를 위한 지방분권국민운동'을 중심으로 뭉쳐있다.
2001년 9월 지식인 선언을 주도했던 대구사회연구소(회장 김형기·경북대) 부산경남지역사회연구센터(황한식·부산대) 전남사회연구소(나간채·전남대) 호남사회연구소(이중호·전북대) 등 영호남 4개 지역 연구단체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룹과 시민단체가 결합해 만들어낸 조직이다. 시민단체로는 경실련 지역협의회와 참여연대 지역네트워크가 참여해있다.
현재 김형기 교수가 대표를 맡고 있고 대구경북본부를 시작으로 10개 지역운동본부를 꾸렸다. 대선을 앞두고 출범하면서 각 선거 캠프에 참여한 인사들과는 차별성을 그었기 때문에 국민운동 회원으로 새 정부에 참여한 인사는 없다. 하지만 김병준, 성경륭, 권기홍, 이정우 교수 등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던 새 정부 인사들과는 계속 교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자치단체 쪽에서는 기초자치단체장 모임인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회장 황대현 대구달서구청장)와 광역자치단체장 모임인 전국시도지사협의회(회장 이의근 경북도지사)가 지방 분권 운동의 깃대를 잡고 있다. 특히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는 최근 지방분권추진특위를 구성, 김완주 전북 전주시장이 위원장을 맡아 본격 분권운동에 나설 채비를 갖췄다.
김두관 행자부 장관이 한때 공동대표로 있던 '지방자치개혁연대'도 '참여와 분권'을 모토로 2001년 초부터 본격적인 분권운동을 벌여왔지만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로는 활동이 미미한 상태다.
/이동훈기자
전문가 진단
중앙집권 서울공화국에 대한 '지방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2000년 5월 영호남시도지사협력회의의 '국토균형발전선언', 10월 지역NGO들의 '지방분권과 자치를 위한 전국시민행동' 출범, 2001년 3월과 9월 '지방자치헌장' 선포와 '지방분권실현을 위한 전국지역지식인 선언' 등이 이어졌다. 마침내 2002년 11월에는 지방의 지식인과 NGO를 비롯한 지역사회 각계를 아우르는 각 지역 분권운동이 연대해 '지방분권국민운동'이 시작됐다. 그래서 지방분권화는 대선의 중심 화두가 되었고,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을 주요 국정과제로 정했고 지역민들은 지방분권시대의 개막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
지방인사나 분권개혁 엘리트가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고 지방지식인들이 중앙권력 자문인사의 일부로 참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부권력에 대한 지방인사와 분권개혁 엘리트의 참여가 이전 시기에 비해 두드러져 보이며 이것은 파격적 중앙엘리트 충원이라 일컬어질 만큼 새로운 변화이다.
그러나 지방출신 인사의 중앙권력 일부 참여가 곧 바로 지방분권화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중앙권력에 대한 지방의 '대표적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민의 눈으로 보면 중앙권력 엘리트집단의 출신지별 구성 변동은 중앙권력내 권력이동일 뿐이며 지방분권화와 지방의 대표적 참여가 권력 지방이동의 관건이다. 중앙과 지방간 권력이동의 핵심은 지방분권화이다. 권력구조가 중앙집권-서울일극 집중에서 지방분권-다극분산으로 변동하는 과정이며 중앙에서 지방으로 결정권과 세원과 인재가 지방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지방분권화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경제의 세계화와 더불어 중앙집권적 국가주의가 비효율과 한계에 부딪쳤고 지역경제의 중요성이 부상함에 따라 지방분권화는 세계사적 추세로 진전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분권개혁 엘리트를 중심으로 분권개혁 드라이브를 시도하고 내년 총선의 중심 화두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앙정치권, 중앙관료집단, 중앙언론 등 중앙권력 엘리트 집단과 집권세력의 장벽은 실로 강고하다. 지방분권화를 둘러싸고 집권세력과 분권세력간의 대립과 갈등이 유례없이 격화할 전망이며 풀뿌리 보수주의 세력과 풀뿌리 민주주의 세력간의 경쟁 또한 주목된다. 아래로부터의 분권운동 역량과 위로부터의 분권개혁 역량사이에, 특히 노무현 정부의 분권개혁엘리트·지방자치단체·지방분권운동 사이에 역동적 관계여하가 향후 중앙과 지방간 권력이동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방의 반란'의 귀추가 주목된다.
황 한 식 부산대학교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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