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도 짙은 고독 속에서 가늘게 생존의 호흡을 이어 왔다. 그것이 나의 언어로 응결이 되어 이슬처럼 나의 영혼에 엉겨 묻었다."8일 타계한 조병화 시인은 시 인생의 출발을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해방 후 귀국, 지독한 고독을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遺産(유산)'을 통해 문단에 이름을 알린 후 이렇게 '외로워서' 쓴 시가 2001년 '남은 세월의 이삭'에 이르기까지 51권의 시집으로 묶였다. 그가 남긴 시는 3,000여 편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사상 최다 기록이자 세계 시문학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고향 경기 안성의 어머니 묘소에 세운 묘막 '편운재'에서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엮은 '편운재에서의 편지'를 최근에 낼 정도로 남달리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해 왔다.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공존의 이유')라든가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사랑의 노숙')와 같은 시편은 젊은이들의 애송시로 꼽힌다. 그는 고독에서 피어난 언어로 사랑을 노래했다. 시는 쉽고 평이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활발한 문단 활동도 그의 중요한 이력 중의 하나였다. 그는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장, 세계시인대회 국제이사 등을 지냈으며 198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서 계관시인으로 선정됐다. 1999년 캐나다 빅토리아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0년 한국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난(蘭)'이 실리기도 했다.
상복도 많아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대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1990년에는 그 동안 모은 원고료로 편운문학상을 제정해 해마다 우수 작품을 쓴 시인과 평론가에게 상을 주어 왔다.
그는 그림을 사랑한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전시회를 열고 시화집을 내는 등 남다른 열정을 그림에 쏟았다. 그런가 하면 '인생을 스포츠처럼'이라는 문구를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큼 스포츠를 즐겼다. 특히 럭비·미식축구협회 창립 멤버였고 배재·양정고 럭비 정기전에서 심판을 맡는 등 럭비 애호가였다.
그는 일찌감치 고향에 자신의 묘비를 세우고 '꿈의 귀향'이라는 시를 새겼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 묘비명처럼 떠나 온 자리로 되돌아 갔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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