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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경북 청도 "소싸움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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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경북 청도 "소싸움 대회"

입력
2003.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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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안개가 유난스럽다. 운문댐을 스쳐 온 축축한 바람이 아직은 매섭고, 쩌억 쩍 논두렁의 질긴 살얼음 밟는 소리가 멀리 용각산에 부딪쳐 울린다. 지난달 25일 새벽 5시30분, 경북 청도군 청도읍 무등리."용돌아, 가자!" 정화덕(57)씨의 고삐를 쥔 손이 흔들리기 무섭게 5년생 황소 용돌이가 먼저 대문을 나선다. "인자, 한 보름 남았다. 알제? 이번 참에는 일등 무뿌자(먹어버리자). 알겄나." 정씨의 다짐을 알아듣기나 한 듯 용돌이도 더운 콧김으로 결의를 보인다. 15일부터 열리는 청도 국제 전통소싸움대회를 염두에 둔 얘기다. 마을 앞 용산사 마루까지 10분 거리. 정씨와 용돌이의 대화는 쉼없이 이어진다. 간 밤의 꿈 얘기부터 집안 대소사, 애달픈 농사 얘기…. 간간이 잔등을 쓸어주는 정씨의 손길에 애정이 넘친다.

비탈길. 정씨가 고삐를 놓자마자 용돌이의 소나무 '뿔치기'가 시작됐다. 정씨의 구령에 따라 700㎏ 남짓의 거구가 들이받고 밀고 치뜨기를 10여분. 용돌이의 잔등에 땀이 배어나올 즈음, 30년 묵은 실한 소나무 밑둥이 허옇게 제 살을 드러냈다. 30여 분간 '산 타기'까지 마치고 정씨는 논으로 향했다. 이 즈음이면 이른 햇살에 안개도 걷히고 얼었던 무논도 녹아 질척거린다. "진 논 걷는 거 이기 진짜배기 훈련인기라. 봐라, 지도 힘든 지 자꾸 논두렁으로 올라갈라 안 카나." 대형 타이어에 H형강, 돌 푸대 등을 얹어 200㎏ 남짓한 길마가 용돌이의 가슴팍에 걸리고 맴돌이가 시작됐다. 용돌이가 지쳐 혀를 빼어 물고, 1시간30분 여의 훈련을 끝낼 즈음이면 정씨의 얼굴도 땀으로 범벅이 된다. 정씨는 "소하고 사람하고 체력도 엇비슷 맞고 성격도 통해야 훈련도 되고 좋은 소가 맨들어진다"고 했다. "고생했다. 인자 밥무로 가자."

정씨가 키우는 소는 35두. 비육우 34마리에 싸움소는 용돌이 하나지만 정씨는 "34마리 거두는 것보다 용돌이 하나 키우는 기 훨씬 힘들고 애럽다(어렵다)"고 했다. 훈련은 그렇다 쳐도, 먹는 것부터 다르다. 비육우야 마른 짚 썰고 사료 부어주고, 가끔 소화제나 섞어 먹이면 그만이지만, 싸움소는 철저히 화식(火食)이다. 재료도 그냥 볏짚 뿐 아니라 칡줄기, 고삼대, 콩, 들깨가루 등 입맛 갖춰 예닐곱 가지를 섞어 여물을 삶는다. 간간이 뱀도 고아 먹이고, 닭이나 미꾸라지 곤 국물도 먹여야 힘을 쓴다. 더욱이 대회가 임박해지면 십전대보탕 한 두 재(10첩 한 재에 12만∼15만원)는 기본이라고 했다. 저녁 무렵 여물을 삶아둬야 하기 때문에 오후 4시가 귀가시간이고, 새벽 훈련을 위해 오후 9시면 우사(牛舍) 곁방에 누워야 한다. 청도읍 내리의 김황곤(47)씨는 "싸움소 키우는 사람치고 여자나 고스톱 등 '딴 짓'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하도 운동을 해서 잔병치레 하는 사람이 없다"며 웃었다.

싸움소는 청도에 약 130여 두(청도군 소유 62두), 전국에 250∼300두 가량에 불과하다. 그래서 투우인이라면 웬만한 소는 이름과 경력, 주특기까지 꿰고 있고, 특히 청도 군민이라면 '꺾쇠'나 '람보' '번개' 등 스타급 소를 모르면 '간첩'이다. 싸움소 한 마리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했다. 2살 남짓 먹은 수컷 비육소가 발정기가 되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그 가운데 성질 사납고, 체형이 갖춰진 놈을 싸움소로 발탁하는 것이다. 앞 다리가 짧고 실해야 하고, 목덜미가 두텁고 길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뿔은, 예전에는 좌우로 나란히 솟은 '비녀뿔'을 쳐줬는데, 소싸움이 '기술시대'로 접어 든 5, 6년 전부터는 앞쪽으로 가지런히 휘어진 '옥뿔'을 최고로 친다. 그래서 비육우야 5살(500∼600㎏)이면 도축장 신세지만, 싸움소는 그 때부터가 시작. 경력과 근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7∼9살이 전성기이고, 길게는 15살까지 현역으로 활동한다. 싸움소는 가격도 천차만별. 소 값이 좋은 올해도 비육우는 황소 한 마리 약 400만원(㎏당 7,000원) 선이지만, 싸움소는 아무리 비리비리해도 700만원 아래로는 구경도 못한다. 1,000만∼2,500만원은 예사고 경력이 화려한 소는 6,000만∼7,000만원을 호가한다. "접때 꺽쇠만 해도 7,000만원 준다 카는데도 안 팔았다 아이가."

전국의 소싸움 대회는 청도를 시작으로 의령 창원 부곡 진주 등 주로 영남 지방에서 매년 9차례 열린다. 그 중에도 청도 소싸움이 단연 으뜸. 수년 전부터 시설을 갖추고 전국 홍보에도 열을 올려 소싸움을 동호인대회가 아닌, 전국민속대회로 성장시켰고, 올해부터는 일본 호주 미국 싸움소까지 들여와 국제대회 규모로 키웠다. "옛날에는 서울서 '청도' 카모 섬인줄 알았다 카디만 요새사 누구나 다 안다 캅디다. 인구 5만의 작은 마을에서 국제대회를 여는 기 어데 보통 일이요!" 청도군은 지난 해 9일간의 대회기간 동안 무려 60만명(외국인 5,000명)의 관광객이 방문, 127억원의 경제효과를 봤다고 밝혔다. '전통소싸움 경기에 관한 법률(2002.8)과 시행령·시행규칙(2003.2)이 공포돼 올 6월 상설 소싸움경기장이 완공되면 매주 말 소싸움 대회를 열 참이다. 군에서는 입장료도 받고, 우권(牛券)도 팔아 짭짤한 세수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군은 사행심을 막기 위해 우권 단가와 구매횟수를 1,000원∼5만원, 하루 3회로 제한키로 했다. "확률 50%짜리 도박 봤십니까. 이겨봐야 얼마나 따겠능교. 관광객들이 와서 내편·네편 나눠서 응원도 해야 재미가 있을 거 아입니꺼."

/청도= 글·사진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마을잔치" 소싸움

"소싸움? 어릴 때 꼴 먹이러 가서 동무들하고 꼴망태 내기 숱하게 안 했나." 지게 되면 애써 모은 꼴을 다 잃고, 소가 긁히기라도 하면 "소 베리났다(버려 놨다)"는 야단과 매 타작이 예사였다. 하지만 꺾여버린 자존심이 분해, 다음 날 등교 길에 만난 친구에게 "오늘 함 더 하자"며 눈싸움을 벌이던 것이 소싸움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청도군만 해도 매전면의 고성 이씨, 이서면의 밀양 박씨, 읍내의 청도 김씨 등 일가들의 족세(族勢) 과시 수단이 소싸움이었다. 단오나 추석이면 으레 마을 대표 소들을 끌고 나왔고, 그 싸움에 앙금이 남아 두고 두고 "점심 묵고 소 끌고 논으로 나온다"하며 또 한 판. 그럴 땐 금세 소문이 퍼져 마을 주민들이 응원하러 나섰고, 막걸리 내기라도 했다면 즉석 잔치가 벌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의 단합수단으로 찍혀 소싸움이 금지되기도 했다.

요즘 소싸움은 몸무게에 따라 갑종(730㎏ 이상) 을종(730㎏ 미만) 병종(640㎏ 미만) 등 3분류에다 종별로 특·일반으로 나뉘는 총 6체급 경기로 치러진다. 다른 지방 대회가 토너먼트 방식인 반면 청도 소싸움은 소의 체력 유지 및 부상 방지를 위해 리그전으로 치러지는 게 특징. 소싸움의 묘미는 육중한 두 황소가 맞부딪쳐 힘과 기술을 겨루고, 한 마리가 힘에 부쳐 돌아설 때까지 계속되는 원초적인 격렬함에 있다. 하지만 소의 움직임을 보고 뿔치기 옆치기 뿔걸이 등 기술을 읽어내는 얼마간의 식견도 필요하다.

한 마을 소끼리 맞붙거나, 아저씨 소와 조카 소가 겨루는 일도 잦다. 그럴 땐 주인이라고 '우짱(경기장 목책)' 안에 들어가 마음껏 응원도 못한다. 이웃·친지와 의가 상할까 두려워서다. 승패가 갈린 뒤에도 승리한 사람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는 경기장 바깥의 '정(情)'은 관광객으로서는 도저히 맛보기 힘든 숨은 재미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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