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솔닛 지음·김정아 옮김 민음사 발행·1만5,000원속도의 시대를 살면서, 그 반동으로 새삼스레 느림을 찬양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 이와 함께 걷기 예찬도 부쩍 많아졌다. 책방에는 걷는 즐거움을 말하는 에세이에서 걷기와 건강, 걸어서 하는 여행 안내서까지 다양한 관련서가 나와 있다.
미국의 문화·예술 비평가 겸 환경운동가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역사'는 다르다. 걷기라는 보편적 행위의 역사를 주로 문화적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조명한 인문교양서다. 이 책은 인간의 진화, 도시 설계, 성 문화, 종교와 문학, 예술, 사회운동 등 다양한 측면에서 걷기의 역사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걷기와 생각하기, 걷기와 문화의 관계를 드러내고, 자동차와 속도 위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걸을 수 있는 공간과 여유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광범위한 교양과 섬세한 시선을 바탕으로 씌어진 이 책은 단순한 신체의 동작이 아닌 사회적·문화적 행위로서의 걷기를 실천한 수많은 인물과 사건 이야기로 가득하다. 산책, 순례, 등산, 행진 등 걷기의 여러 형태와 역사를 두루 살핌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걷기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걷기는 "세계의 지도를 그리고, 세계에 길을 내고, 세계와 만남으로써 세계의 모습을 바꾸는 방식, 행동이 문화를 반영하고 재창조하는 방식"임을.
책은 4부로 이뤄져 있다. 1부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영감을 얻었던 철학자와 시인들의 삶을 통해 걷기와 사유의 관계를 말한다. 2부는 축제와 순례, 행진과 혁명 등 다양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걷기의 의미를 끌어낸다. 3부는 런던 파리 뉴욕 등 대도시에서의 걷기와 걷기의 성적인 함의를 다룬다. 끝으로 4부는 현대적 풍경으로서 걷기의 상실과 이를 복원하려는 예술적 시도를 중심으로 문명비판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걷기에 처음으로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루소다. 그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는 걷기 자체를 즐긴 첫 번째 여행자로서 그의 시는 모두 야외 산책에서 나왔다.
이 책은 각 도시를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 주인공의 삶을 통해 도시의 역사와 걷기의 역사를 나란히 펼쳐보인다.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 앨런 긴즈버그, 데이비드 보즈나로빅츠 등의 19세기 말과 20세기 뉴욕,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19세기 중반 런던, 발터 벤야민을 매혹시킨 20세기 초 파리의 모습을 보행자의 시각에서 묘사한다.
자유롭게 걸을 권리를 갈망했던 여성들의 고난과 투쟁을 다룬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여성들은 낮에도 혼자 돌아다닐 수 없었고 야간 산책은 금기였다. 그랬다간 창녀로 몰려 강제로 '의학 검사'를 받거나 감옥에 갇혔다. 19세기 영국의 여성 소설가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여주인공의 입을 빌려 여성의 홀로 걷기를 자유와 독립의 표상으로 그렸다. 그러나 1963년에 죽은 20세기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여전히 절망한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나의 끔찍한 비극"이라며 "열린 들판에서 자유롭게 잠들고, 서부를 여행하고, 밤거리를 자유롭게 거닐고 싶은" 열망을 토로한다.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의 도시 구조와 혁명의 관계를 걷기를 연결고리로 설명하고, 인권·반전·반핵 등을 외치는 평화행진과 각종 기금 마련 걷기대회에서 걷기의 역할을 분석하고, 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에서 황금기를 누린 걷기 클럽의 역사를 소개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저자는 오늘날 야외를 산책하기보다 헬스클럽의 러닝머신 위에서 기계적 걷기를 연습하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바위를 언덕 위로 굴려 올리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를 떠올린다. 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한다. "이러한 장치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관심, 혹은 세상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대한 관심을 없애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걷기라는 창을 통해 몸과 상상력, 그리고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들여다 본 이 매력적인 책은 다음과 같은 멋진 문장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걷기는 인간 문화의 하늘에 펼쳐진 별자리 중 하나이며, 이것을 이루는 세 별은 육체, 상상력, 드넓게 펼쳐진 세상이다. 별자리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부과된 것이다. 별 사이에 그어진 선은 앞서 간 사람들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과 같다. …이 별자리의 역사에 미래가 있는가는 아직도 이 연결 통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45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지만, 걷기의 역사를 수놓은 크고 작은 길과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은 즐겁다. 읽고 나면 우리가 평소 걷는 도심의 거리 풍경도 예전과 다르게 보일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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