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지상에 새봄의 꽃만큼 화사한 젊은 여인들의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대학 졸업 사각모를 쓰고 한 줄로 늘어선 아가씨들이었는데, 모두 다 그 대학의 단과대학별 수석 졸업생들이라고 했다. 마음 속에서는 부러움 반 감탄 반의 탄성이 나오는데, 입으로는 '도대체 남자들은 다 뭐 한 거야?'라고 중얼거리다가 혼자 실소했다.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남성중심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세상이 하도 급변하고 있어서 나 역시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멀미를 앓고 있다. 아직도 똑똑한 딸을 둔 어머니들은 딸이 혼기가 되면 흐뭇함보다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자기 딸보다 나은 신랑감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수긍이 가지만 이젠 그 균형감각도 수정을 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트로피 허즈번즈(Trophy husbands)라는 말이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춘에서 최근 기사화 되어 화제다. 이 잡지는 1980년대 말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를 커버스토리로 내세워 세간의 이목을 모았었다. 트로피 와이프란 미국의 성공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장년 남성들이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마치 성공의 보상으로 트로피를 받듯 결혼하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말한다. 이에 반해 트로피 허즈번즈는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여성들의 증가로 아내를 대신해 주부 역할을 전담하는 남편들이다. 그들이 무능하고 사회적으로 할 일이 없어서 집안에 들어앉은 것은 아니다. 부인이 일하는 편이 더 경제적이라고 판단되면 남편 스스로 선택해서 가사를 전담하는 것이다. 이런 남편들은 미국에서 불과 5년 사이에 급속히 늘어, 포춘이 2002년 선정한 영향력 있는 미국 여성사업가 50명 중 3분의 1이 이런 남편을 가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마누라 덕에 애들 학비 걱정 안 해요'라고 자랑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네 분위기에서는 '아내 덕'을 보고 사는 남편이 주변의 질시와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남편 덕'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성공한 남자의 아내와는 대조가 된다. 아내 편에서도 남편이 자신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흔히 잘 나간다는 전문직 여성 부부들은 가사 일도 큰 걸림돌이지만 이런 사회적 편견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왓 위민 원트'에서 여주인공 달시는 유능한 광고 기획자로 인정받지만, 성공할수록 자신이 실패자가 되는 것 같다고 마음 속으로 부르짖는다.
아직도 세상은 성공한 여성을, 자기 일을 위해서는 가족도 서슴없이 내팽개치는 이기적이고 못된 품성을 지녔거나, 여성적인 매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못난 여자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들이 그들 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여성들에게 빼앗겨야 하는 심적 갈등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여성들이 가정생활과 직장 일 두 가지를 완벽하게 해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남성이 사회에서 일하는데 아내의 내조가 필요하듯, 밖에서 일하는 여성도 안정된 가정생활 여건이 절대 필요하다. 가끔 직장 여성들이 '내게도 아내가 필요하다'며 농담 삼아 지르는 비명이 실없는 우스갯소리가 아님을 알아채야 한다.
봄의 여린 나뭇잎새가 겨울 강풍을 물리치고 눈부신 꽃을 피워내듯, 우리나라에도 차츰 트로피 허즈번즈가 낯설지 않게 될 것이다. 남편의 성공을 자신의 성취로 믿고 보람을 찾는 아내들처럼, 일하는 여성의 남편들도 아내의 성공을 자기 자랑으로 알고 기꺼이 도와주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여성이 법무장관에 임용되었다고 의구심부터 갖는 일은 없을 것이며, 대개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의처증에 빠졌던 모 여성 개그맨의 남편도 가정 폭력범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 명 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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