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에버트 지음·최보은 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발행·1만5,000원'매일같이 도둑의 손수레를 검사하는 경비원에 대한 옛날 얘기가 있다. 경비원은 도둑이 훔치는 게 뭔지를 알아낼 수가 없다. 도둑이 훔치는 것은 다름아닌 손수레다. 유대인들은 쉰들러의 손수레다.'
이토록 경쾌한 비유로 영화 '쉰들러의 리스트' 줄거리를 요약하는 평론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또한 '펄프픽션'의 위대함을 '시간 구조를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토대인 대사'의 힘에 있다고 보는 시각은 얼마나 개성적인가.
로저 에버트(61)가 36년 넘게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평론가로 이름을 떨친 데는 이유가 있다.
할리우드는 늘 그의 날카로운 눈과 두 엄지손가락을 예의 주시해 왔다. 그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린 영화는 좋은 영화라는 믿음이 할리우드에 퍼졌다. 그의 유려하고도 간결한 글은 할리우드 영화비평의 대명사다. 그는 선정주의, 또는 독불장군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권위의식이나 어려운 용어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관객과 영화계가 고개를 절로 끄덕거릴 글을 써왔다.
이 책은 1997년부터 시카고 선 타임스에 연재해 온 '위대한 영화' 가운데 90편을 추려 묶은 결과이다.
그의 진가는 '시민 케인' '현기증' 등 영화사의 교과서적 작품을 말할 때가 아니라 '펄프픽션' '양들의 침묵' 'E.T'(사진) '카사블랑카' '쉰들러 리스트' '쇼생크 탈출' '파고' 등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영화를 얘기할 때다. '파고'에서 주인공 마지의 주인공 동창이 왜 나오는지를 짚는 그의 대목은 꼼꼼하기 짝이 없다.
그는 잘난 척 하면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나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이론을 내세워 독자의 기를 죽이지 않는다. 대중적이고 상업적이라고 평론가들이 은근히 낮춰보는 스필버그의 작품을 격찬하고 '양철북'처럼 걸작으로 인정 받는 영화를 깎아 내린다.
그의 선구안은 괴팍하고 편파적이다. 그러나 그의 편파성은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공정한 감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통해 면죄부를 받는다.
어떤 영화는 수십 번을 보고, '분노의 주먹'은 영화 편집자와 함께 보고, '카사블랑카'는 촬영감독과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관객에게 미개척지로 남은 위대한 영화'를 소개하려고 애쓴 흔적이 곳곳에 선명하다.
어렵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가 풍부하며, 쾌감을 주는 산뜻한 비유가 살아 숨쉬는 이 책의 흠을 잡기란 어렵다.
다만 '빅 슬립' '부초' 등 그가 소개한 영화의 70%를 비디오 대여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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