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방정식에 절대적인 의미를 붙이고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은 말하자면 청탁자가 없는 청부업자였다."(선우휘 '불꽃'·1957).부탁도 안했는데 스스로 나서서 설치는 청부업자는 제멋대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책임진다고 설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 노동자 천국을 만든다면서 무고한 사람을 수없이 죽이고도 노동자들을 노예로 전락시킨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자들이다.
자기가 세운 이론에 따라 인민을 행복하게 해 줄 터이니 따라오라고 하고는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 자신들은 인민들만을 위해서 살 것이며 혁명은 희생이 필요하다면서 남의 희생만 강요했다.
여건 야건 자기들만이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통일할 수 있다며 한 치도 안 물러서고, 내 패가 아니면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고 설치던 1950년대 중반, 어린 나이에 '사상계'를 구독하고 과격한 정치논설들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념 지향의 문학작품과 논설에 빠져들어 있었다. 이념서적들을 구하기 어려운데도 기를 쓰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자유당놈들 하나 남기지 말고 쓸어 버려야…"라는 과격한 생각으로 고교생 주제에 야당 후보의 연설장에 열심히 쫓아다니던 시절이다. 소위 위대한 혁명가들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를 그렇게 실망시킨 바로 그 사람들, 자칭 민주화 투사들에게 매료됐었다.
그때 나를 일깨운 책이 선우휘의 소설 '불꽃'이다. 복합적인 본래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인간은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아름답고 행복해야 한다"는 말과 "청탁자 없는 청부업자"의 속성에 관한 작가의 탁월한 지적은 자아도취와 그로 인한 편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끄는가를 알게 해 주었다.
나 자신의 견해에 대해, 분명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남의 의견을 반대할 때도, 그것이 자아도취나 편견은 아닌지 끊임없는 의문을 던지게 됐다. 그러면서도 지나고 보면 나 역시 자아도취와 편견에서 남을 질타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주 열어 보는 책 중의 하나가 '불꽃'이다.
"자기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든가, 오로지 남을 위해 산다든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든가, 그런 인물들이 말썽을 일으키기 쉬워. 그들은 그렇게 내세우면서 대개 남보다는 자기를 위하고 자기는 죽는 일 없이 남을 죽게 하는 수가 많거든."(선우휘 '외면'·1977)
김 이 영 성균관의대·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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