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인천 연수구 송도유원지 앞. 아스라이 보이는 수평선을 배경으로 시뻘건 흙을 실은 덤프트럭 수십 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바다를 향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갔다. 바닷가에 막 도착한 트럭이 흙더미를 쏟아내자 곧바로 포크레인이 달려와 흙을 바다로 밀어냈다. 공사장의 한 인부는 "언제 인천 앞바다를 메우나 싶었는데, 날마다 조금씩 뭍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끝간데 없이 드넓은 공사현장 앞에 붙어 있는 팻말은 '송도 공유수면 매립 공사'. 이곳이 바로 새 정부가 "변방의 역사에서 벗어나 동북아의 중심으로 거듭나자"며 추진하고 있는 '정보통신(IT) 허브'가 들어설 송도 매립지다.
바다 건너 왼쪽으로는 시화공단, 오른쪽으로는 멀리 영종도 신공항의 관제탑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국제업무단지', '테크노파크 부지' 등으로 나뉜 송도 매립지는 1994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탓인지 제법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새 정부가 IT 허브안을 내놓기에 앞서 10여년 전부터 허브 조성을 추진했던 인천시 산하 도시개발본부 박찬훈 투자유치부 1팀장은 "매립지 조성은 시작에 불과할 뿐, 허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밝혔다.
물류를 담당할 인천공항과 제조업 단지 조성이 가능한 김포 매립지와 가까워 삼각 축을 구성할 수 있는 송도에 IT 관련 기업 및 연구기관을 끌어들여 IT 산업 클러스터(집적단지)로 조성하겠다는 것이 새 정부의 생각.
디스플레이, 비메모리 반도체, 모바일 통신기기 등 분야 관련 국내 기업과 다국적 기업, 연구소 등을 결집시켜 세계 IT 산업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R&D 허브'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사실 인프라 수준만 보면 한국은 충분히 허브로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컨테이너 처리 능력 세계 3위의 부산항이 있는데다 각각 25선석, 16선석 규모의 부산신항과 광양항이 건설되면 향후 10년간 동북아에는 필적할 항구가 없다.
또 홍콩 첵랍콕이나 싱가포르 창이공항과 견주어 전혀 뒤지지 않는 인천공항도 있는데다 3시간 이내 비행 반경에 인구 100만명 이상 도시가 43개(인구 10억명)나 있을 만큼 배후시장도 넓다.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히고 있는 분단 상황도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남북이 협조만 할 수 있다면 세계 최대의 소비 시장인 중국 및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어지는 항로, 육로, 철로의 시작점이 될 수 있기 때문.
하지만 IT 허브 구상이 발표된 이후 외국 기업들은 물론, 국내 기업에서도 SK와 현대자동차 만이 일부 R&D 센터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은 왜 일까.
김기환 서울파이낸션포럼 회장은 "특정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기 보다 국가 차원의 규제개혁을 단행하는 등 나라 전체의 경제 시스템을 바꿔야만 허브 구축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의 한 관계자도 "국내 기업조차 활동하기 어려운 마당에 아무리 특혜를 준다고 해도 외국 기업을 빨아들이는 허브가 될 수는 없다"면서 "일단 기업하기 좋은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외국인 근로자 문제, 여성인력 활용 문제 등에서 후진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다 고질적인 노사문제, 투명하고 공정하지 못한 시스템, 기업 설립과 투자 등에서 아직도 복잡하기 만한 제도적 절차 등을 고쳐야 한다.
게다가 외국기업이 들어와 활동하기에는 사회적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도 많지않고, 자녀를 안심하고 맡길 외국계 대학조차 없는 나라에 수십억 달러가 되는 연구시설을 갖고 들어올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다.
가장 큰 문제는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내부적인 합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 대덕과학단지와 연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송도에 이미 사업을 벌려놓은 인천시와의 조율이 시급하다.
특히 재경부와 인천시는 국내 기업부터 유치하자는 구상에도 반론을 펴고 있다. "허허벌판에 건물만 세워 놓는다고 외국기업이 들어오지 않으며, 외국기업 유치를 위해 특혜부터 주면 계속 끌려 다닐 수 있다(새 정부)"는 주장과 "허브가 성공하려면 외자 유치가 가장 중요하고, 치열한 허브 경쟁 때문에 웬만한 특혜에는 꼼짝도 않는데 최소한의 유인책은 필요하다(재경부)"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또 새 정부가 허브의 성격을 IT를 중심으로 하는 'R&D' 허브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재경부 등에서는 금융·물류를 중심으로 하는 복합허브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싱가포르 국립대 신장섭 교수는 "21세기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허브가 새로운 성장엔진이 되어야 한다"이라며 "우리가 처한 조건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는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대덕은 어쩌라고"
30년간 자타가 공인해온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 대덕밸리가 최근 동요하고 있다. 대덕을 강타한 메가톤급 충격은 바로 새 정부의 '송도 IT허브' 구상. 올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송도를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같은 정보통신(IT)과 연구개발(R&D)의 집적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드러내면서 대덕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덕의 과학기술자와 벤처 기업인들은 연구기관과 기업들이 송도로 몰려가면 대덕은 빈 껍데기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있다. 대덕 소식을 다루는 인터넷신문 '대덕넷'의 이석봉 사장은 "국가의 한정된 자원을 선택적이고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30년간 공을 들인 대덕을 팽개치고 처음부터 다시 송도에 투자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올해로 조성 30주년을 맞은 대덕밸리는 그 동안 30조원이 투자돼 840만평의 광활한 땅에 1만6,000여명의 연구인력과 900여개의 벤처기업,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고등교육기관이 몰려있는 국내 최대의 산·학·연 생태계로 성장했다.
때문에 대덕인들은 대덕을 과학기술특구로 지정, 동북아 R&D의 중심으로 성장시키자는 제안을 김대중 정부와 지난 대선에 출마한 각 후보들에게 여러 차례 전달해왔다. 그런데 물류와 금융의 거점으로 구상되던 송도가 느닷 없이 IT밸리와 R&D의 허브로 거론되니 대덕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러 차례 반대 성명을 낸 대덕밸리벤처연합회 백종태 회장은 "송도 IT허브 구상은 국가경쟁력과 국토의 균형개발, 자원의 효율적 사용 등을 생각하지 않은 무리수"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허허벌판인 송도에 IT 허브를 구축하려면 최소 10년은 걸릴 텐데 그 사이 중국이 우리를 추월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덕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준비중이다. 대전시와 대덕밸리벤처연합회, 정부출연연구기관, 지역대학 등은 '대덕밸리의 동북아 R&D 허브 구축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지역이기주의 차원을 넘어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대덕의 논리'를 개발, 정부와 국민들에게 홍보할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일각에서는 송도의 입지적 우수성과 대덕의 축적된 과학기술을 잘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즉 동북아 물류중심으로서 송도와 R&D의 중심으로서의 대덕이 거리상으로도 멀지 않아 교통망 등을 잘 정비해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면 상호발전 모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대덕밸리 중견과학자들의 모임인 대덕클럽 신성철(KAIST 교수) 회장은 "선진국을 추월하고 동북아를 선도하려면 이미 상당한 탄력을 받기 시작한 대덕을 버려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했다. 한 정부출연기관 연구원은 "새 정부가 송도 IT허브 구상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결국은 대덕과의 연계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대전=전성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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