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같이 공연하는 배우 아십니까? 박철민이라고 운동권에서 '민주 대머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명 사회자 출신이지요. 제가 연출자에게 같이 출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배우 명계남(51)씨를 연극 무대로 다시 부른 극단 차이무의 '늘근도둑 이야기'(이상우 작·연출)가 1일 공연 시작 이래 연일 매진 행진을 하고 있다.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무대에 4월 27일까지 오르는 이 연극의 인기는 무엇보다 명씨의 유명세 덕분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3인극이 명씨와 여러가지로 케미스트리가 맞는 연극계 후배 박철민(36)씨의 절묘한 장단 맞추기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손쉽게 성공을 예약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연극 복귀를 앞두고 명씨가 인터뷰에서 '민주 대머리'라고 여러 차례 특별한 애정을 표한 박씨는 이 연극에서 좀 덜 늙은 도둑으로 출연하고 있다.
"별명이 '민주 대머리'인 이유요? 그 시절에 '독재 대머리'인 분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잖아요. 저는 무대에서 세상에는 민주 대머리도 있으니 대머리도 사랑 받을 권리가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지요. 시절이 시절인 만큼 그게 인기를 끌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에게서 왕년의 별명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7,8년 전부터 가발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좀…"이라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그에게는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민주'라는 수식어만 중요하게 남았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에 들어간 노동연극 전문극단 '현장'에서 그는 긴장이 감도는 파업 현장에 웃음과 여유를 던지는 배우 겸 MC로 눈부신 활동을 했다. "김영삼 정부 초반까지는 파업이 많아서 하루에 세 곳이나 찾아가서 공연한 적도 있었어요. 대학 초청공연도 많아 안 가본 대학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때 하던 연극들이 악덕 기업주와 사회구조를 풍자한 '노동의 새벽' '이바구 세상' 등입니다. 파업에 지친 노동자들을 위한 문화공연이 펼쳐지면 우리 극단은 물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꽃다지' '노래마을' 등이 자주 출연했습니다."
그가 회상하는 무대는 무척이나 넓었다. "현대중공업 파업 때는 구사대에게 멱살을 잡힌 채 끌려가다가 조합원들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습니다. 풍산금속 공연 때는 자동차 트렁크 안에 숨어서 소품을 날랐던 적도 있고요. 경찰서에 잡혀가 지금은 사라진 노동쟁의조정법의 제3자지원금지 조항 위반 혐의로 잡아 넣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품바' 등에서 해학 넘치는 역할을 맡아 항상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그의 입에서라고는 믿기 어려운 험악한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그는 대학 시절을 술과 데모, 연극, 사랑 네 가지로 집약해 기억했다. "그래도 10학기, 5년 만에 졸업했지요. 사실은 졸업을 당한 겁니다. 저를 좋아한 교수님들은 철민이 의기가 아깝다며 학점을 주셨고, 미워한 교수님들은 학교에 계속 있어봐야 문제만 일으킨다며 학점을 거저 주셨지요. 5년 중 4년은 강의실 대신 연극반에서 지냈고, 중간에 학생회장을 1년 했습니다. 공부는 동아리방에서 술과 함께, 잠잘 때는 도서관에서…(웃음). 전방 입소교육 거부투쟁도 했고, 민정당 연수원 점거농성도 했고, 데모가 벌어지면 북을 쳐 대며 상황극을 하고 그랬죠. 그때는 큰 권력을 가진 소수와 대립하던 시기여서 사회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당연했어요."
'민주'를 뺀 그의 삶은 역시 연극이 뿌리다. 대학 시절 함께 운동권에 있었던 몇몇 학생회장은 정치판으로 떠났고, 연극반 동기 중 연극을 계속하는 사람은 대전에서 '우금치'라는 마당극단을 이끌고 있는 한 친구뿐이지만 박씨는 앞으로도 연극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는 한때는 생활고로 과일 행상을 하다가 털어먹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형님이 성우였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형님은 추상미씨의 아버지 고(故) 추송웅씨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고 감동해서 추씨를 만나보려고 집 앞에서 밤새 기다리기도 할 정도로 연극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광대'임을 자랑스러워 한다. 끼도 만만치 않다. 출퇴근 직장생활은 도저히 성미에 안맞는다. 민주, 개혁정치에 관심이 많지만 정당 가입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술 예찬론도 광대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좋을 때가 마음 맞는 사람과 젓갈이나 삼겹살 등 맛깔 나는 안주를 앞에 놓고 소주를 마실 땝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치과의사 연극인 박종권씨, 연극협회 회장 최종원씨 등이 그와 함께 앉아 두주불사를 마다하지 않는 연극계 인사들이다. 명계남씨와는 영화 '이재수의 난' 때 만났다. "지방공연을 가면 각지의 특산술과 안주가 있지요. 그 중에서도 제주 성산포 갈치회가 일품입니다. 광대들은 기분 나면 노래방 안가도 저절로 노래 나오고 춤 추며 시를 가지요." 그는 '뭐없나'라는 이름의 술모임 회장도 했다며 웃었다.
연극의 짜릿함이 계속 그를 연극판에 붙들어 두고 있다. 2000년 연극 '기호 0번 대한민국 김철식'에서 민족적 낭만주의자로 정치판의 돈키호테로 살다 간 김철식 역을 맡았을 때는 그 삶의 슬픈 아름다움에 스스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마당극 '밥'에서는 공연 중 화장실 가시는 할머니께 애드립으로 "할머니 재판 중에 나가시면 안돼요"라고 했다가, 할머니께서 "가짜 판사잖여"라고 대답해서 온통 웃음바다가 된 적도 있다. 때로 장난끼 넘치고 때로 진지한 자신의 연기에 관객이 "정말 잘 봤소"라며 박수를 칠 때의 짜릿함을 그는 "흐르는 땀방울에서 발끝부터 올라오는 소름이 느껴진다"고 표현했다.
평범함을 거부하고 살아온 삶이었지만 이제 박씨도 극단에서 2년의 연애 끝에 만난 부인과의 사이에 아이들을 둔 가장이다. 가족과 처가에 간다며 자리를 일어서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 평범한 30대 남자의 초상이 어리고 있었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