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대면 누구나 금세 알 만한 사회명사(이 말에는 좀 어폐가 있다. 그 이유는 곧 밝혀진다)가 어느 날 골프장에 갔다. 티 업을 준비하는 동안, 한 팀을 이룬 여자들이 먼 발치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그에게도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저 사람 ○○○ 아니니?" "얘는, 그 사람 죽은 지가 언젠데? 교과서에 글도 실려 있잖아"하고 말을 하더란다. 대학제자들로 보이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교과서에 실린 글의 필자는 대부분 작고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컴퓨터를 고치기 위해 집에 온 젊은 수리공은 여러 기념패에 씌어 있는 이름과 글을 보고 자기도 눈치는 있다는 듯 "아저씨가 글을 좀 쓰시나 보죠?"하고 그의 부인에게 물었다. 그의 부인은 하도 기가 막혀서 "좀 쓰는 편이죠"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어느 세미나에서는 일본측 인사들에게 그를 소개하던 여성통역자가 이름의 'ㅓ'를 'ㅗ'로 바꿔 불렀다. 그가 누군지 몰랐던 것이다. 웃으면서 이런 에피소드를 들려 준 그는 "얼굴과 이름이 많이 팔려 행동에 제약을 받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더라"는 말도 했다.
■ 젊은이들은 '고전'을 잘 모르며 한 세대 전의 인사들에 대해서도 대체로 무지하다. 그래도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보아와 강타는 속속들이 알지만 황금심이 누군지 몰라 사망기사를 쓰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요담당 기자도 있었다. 빌 게이츠가 말하는 생각의 속도처럼 망각의 속도도 빠른가 보다. 프랑스 화가 마리 로랑생은 권태 슬픔 불행 아픔 버려짐, 외톨이가 되는 것, 유랑생활, 죽음을 점층적(漸層的)으로 나열한 뒤 이런 것들보다 더 불행한 것은 잊혀지는 것이라는 시를 남겼지만, 잊혀진다는 것은 분명 서럽고 억울한 일이다.
■ 그러나 새 판을 짜려면 전의 판은 잊어야 하리라. 제 1부에서 인간의 현세적 문제를 다룬 '파우스트'는 망각의 과정을 거쳐 제 2부에서 예술창조와 상징을 통한 삶의 문제 해결을 지향한다. 제 2부의 첫 장면에서 꽃이 만발한 들판에 누워 있는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의 비극을 비롯한 제 1부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각계에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했다. 새 얼굴들의 등장은 그만한 정도의 사람들이 잊혀져 간다는 뜻도 된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이 젊기 때문에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세대는 저절로 잊혀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임철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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