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출범을 앞두고 지식인 사회에 주목할 만 한 이벤트가 있었다. 진보학자들의 모임인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가 지난달 19일 주최한 '21세기 지식학술운동의 전망과 대안'이란 주제의 토론회. 이날 참석자들은 '제도권 정치에 참여할 것이냐, 비판적 지식인으로 남을 것이냐'로 난상토론을 벌였다. 진보개혁성향의 학자들이 정권참여를 공개적으로 고민하는 모습 자체가 파워엘리트의 혁명적 변환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학계에 빅뱅이 일어나고 있다. 그간 변방에 머물렀던 진보학자들이 주류화하는 한편 세대교체 흐름과 함께 이념적, 학문적 다양성이 확장되는 백가쟁명의 시대가 도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보수와 진보학자의 균형
이정우(경북대) 김대환(인하대) 성경륭(한림대) 김병준(국민대) 권기홍(영남대) 이종오(계명대) 정태인(한국사회과학연구소)등 참여정부의 기획, 경제, 사회분과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했던 교수·박사출신 인수위원들은 모두 학단협출신. 진보학자들이 제도권 정치에 이처럼 대거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의 현실정치 참여에 대해 진보학자내에서는 '학자로서 정치적 중립성의 훼손'(손호철 서강대교수), '독립성 유지(조희연 성공회대교수)'등의 이유로 비판하는 평가가 제기되기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약진'이 학계에 미칠 영향은 앞으로 매우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다. 90년대이후 한신대, 성공회대 등에서 시작된 진보학자의 교수임용은 참여정부하에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언론개혁을 주도한 진보학자인 김동민(한일장신대)교수가 지난달 서울방송 사외이사로 참여하는 등 기업체 사외이사나 연구프로젝트를 맡는 일도 크게 늘 전망이다. 실제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와 연이 닿았던 학자들에게 기업체들의 연구프로젝트가 몰렸던 현상이 있었다.
학단협 상임대표인 조희연 교수는 "변방에 머물던 진보학자들이 주류 혹은 중심부로 이동하는 현상은 보수·진보학자 그룹간의 지적 세력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며 "일류대 학자가 학문에서도 일류로 인정받는 학문적 공신력 독점도 해체되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학계 내·외적 변화로 입지가 축소되고 있는 보수학자들의 위기의식은 날로 커지고 있다.
"사회과학계의 전체 숫자로는 보수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40대 교수층은 진보와 보수가 양분돼 있고 아직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석·박사는 대부분이 좌파이론을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스승은 보수이론을, 제자는 진보이론을 택하는 학문의 괴리가 원인이고 학문을 전승하지 못한 스승의 책임이 크다."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연세대 유석춘(사회학) 교수의 말이다. 특히 유교수는 "진보학자의 세력과 영향력이 커진 지금 보수학자들 사이에 뭔가 모임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논의는 있지만 쉽지가 않다"면서 "80년대 사회과학계를 휩쓸었던 사회구성체론이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현재의 진보논리 역시 실험적일 뿐 대안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세대교체와 백가쟁명
진보학자들의 세력확장과 함께 학계의 큰 흐름은 세대교체의 가속화. 공교롭게도 소위 일류대에서 30년이상 전공분야를 이끌어온 원로학자들이 지난학기에 정년퇴임했다. 신용하(사회학)를 비롯, 백낙청(영문학) 정진홍(종교학)등 서울대교수와 고려대 김우창(영문학), 연세대 김인회(교육학)교수 등이다. 서구이론을 도입, 한국적 학문으로 토착화시킨 이른바 '4.19세대'의 리더였던 이 60대 원로들의 퇴진과 함께 50대와 40대의 학자들이 학계의 주력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이러한 세대교체는 한 사람의 학문적 성과와 연구업적이 수 십 년간 후학에게 영향을 미치는 '학문적 멘토(대스승)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의 한 교수는 "학문의 세분화와 수적 팽창으로 특정학자의 학문적 영향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시대는 앞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며 "백 사람이 백가지 이론과 연구로 경쟁하는 현상이 계속돼 과거세대의 상징성을 갖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 교수도 "진보와 보수담론뿐만 아니라 탈이념적 담론이 어우러지는 등 학문의 스펙트럼이 더욱 다양해 질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최근 성공회대 NGO대학원에 서울대 연·고대 학부출신이 줄을 잇는 등 특정교수와 특정학파를 찾아 학생들이 몰리는 학벌파괴적 진학현상도 학계 내부의 균열과 변화양상의 한 단면이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 학술단체협의회
참여정부에 핵심멤버들이 대거 진입하면서 사실상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학술단체협의회(상임대표 조희연)는 진보적 학술운동단체의 집합적 모임이다.
한국산업사회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정치연구회 등 개별 분과 단위로 있던 기존의 진보적 학술단체가 1988년 6월 처음으로 주최한 연합심포지엄에서 '한국사회의 계급구성'을 주제로 발제한 충북대 서관모교수가 이적성을 이유로 구속되는 필화사건이 계기가 돼 그 해 11월 학단협으로 정식 출범했다. 10개 학술단체가 참여했고 최장집(고려대) 안병욱(가톨릭대) 정석종(영남대) 등이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때 학단협의 주요 멤버는 30·40대의 비주류 소장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치, 사회, 역사, 철학, 경제, 언론, 여성등 21개 회원단체로 불어났고 회원은 2,000여명. 이 가운데 대학교수는 400여명 정도로 한국의 좌파·진보적 지식인이 망라돼 있고 상당수는 해당전공분야에서 중견으로 성장해 있다.
학단협은 특히 95년 경상대 장상환(경제학) 교수 등이 공동집필한 '한국사회의 이해'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로 기소된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 핵문제, 폭리제한법 등 각종 시국문제에 비판적·진보적 목소리를 높이는 등 실천운동단체로 변모했다.
지난해 대선과정에서는 개인적 성향에 따라 노무현 캠프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캠프에도 정책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노 캠프의 경우 사이버 정책자문단을 통해 대거 공약형성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희연 상임대표는 향후 진로와 관련, "시민사회의 비판적 잠재력의 저수지로서 위상을 재정립하고 조직을 질과 양적으로 풍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정진황기자
■전문가 진단
최근 우리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세대교체다. 학계에서도 이 세대 교체의 바람은 감지할 수 있다. 다만 다른 분야와 달리 학계가 갖는 특성상 그 바람이 거센 것 같지는 않으며, 분야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서 학계의 권력이동은 세대교체보다는 패러다임 변화에서 찾아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세대교체와 패러다임 변화는 물론 다르다. 하지만 이 둘의 변화는 적지 않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은 대체로 젊은 세대들의 도전적인 발언으로 시작되며, 그것이 주도적인 패러다임으로 변화하면서 자연스레 세대교체도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지식이라 하더라도 사회 구조 및 변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볼 때 60년대 이래 우리사회를 주도해 온 담론의 세 축은 산업화, 민주화, 민족주의다. 전체적으로 산업화를 중시하는 담론은 보수주의로, 민주화를 중시하는 담론은 진보주의로 나타났으며, 민족주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담론 모두에 의해 공히 강조됐다.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치를 모두 중시하는 흐름은 중도주의를 이뤄 왔다.
산업화, 민주화, 민족주의 담론의 기초를 쌓고 심화시켜 온 학자들은 이른바 '4·19 세대'와 그 후배 세대다. 해방 이후 우리말로 본격적인 교육을 받은 이 세대들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 속에서 외국 이론들을 적극 도입하는 동시에 토착적 인문·사회과학을 활발히 모색함으로써 우리 학문의 기반을 닦아 왔다.
앞선 세대들의 이런 패러다임들은 87년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백가쟁명의 시대를 맞이했다. 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세계화 담론 등이 소개되면서 이들은 기존 담론들과 대립하고 경쟁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새롭게 결합하기도 했다.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한 세대는 70∼80년대 대학을 다닌 '유신 세대'와 '386 세대'다. 이들은 80년대에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사회과학의 시대'를 열었으며, 9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앞세워 '문화의 시대'를 열기도 했다.
최근 우리 학문의 흐름에서 이 세대들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특히 80년대 이후 '비판 패러다임'의 약진은 '학문적 시민권'의 획득을 넘어서서 현실 정치와 사회에 작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모름지기 학문의 생명력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설득력 높은 처방이다. 유신 세대와 386 세대를 포괄하는 민주화 세대가 주도하는 패러다임이 우리 학문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우리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김 호 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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