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새로운 음악을 지향하는 젊은 인재들이 끊이지 않았다. 가수 지망생들이 내 사무실을 직접 찾아 오기도 하고, 더러는 내가 찾아 나서기도 했다.맨 처음 발탁된 여가수가 1964년에 만난 장미화다. 섹시함과 현란한 율동을 겸비한 그녀는 미 8군 무대가 제격인 가수였다. 나 역시 거기서 일했지만, 그때는 가수를 키워내는 것보다 미군 무대에 서는 일이 더 중요했던 까닭에 제대로 신경을 써 주지 못 했다. '굿나잇 등불을 끕니다' 등 딴 사람의 작품을 '에드훠'의 음반에 삽입해 주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에드훠 해산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다.
그 후 내가 직접 발탁해 낸 가수가 이정화다. 패키지 쇼에는 여가수가 꼭 필요했다. 마음에 드는 여가수를 구하기 위해 종로 5가를 헤매다 한 라디오 공개 프로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녀를 발견했다. 현장에서 픽업돼 즉시 '넉아웃'의 멤버가 된 그녀에게 '봄비'와 '꽃잎'등을 주었다. 두 곡 모두 한국 가요의 질을 높여 미국의 음악에 버금가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쓴 것이다. 그러나 '덩키스'와의 시민회관 무대 때문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해 당시는 주목 받지 못 했다. 67년 그녀는 베트남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다음에 내 사단에 머문 여가수들이 이미 이야기한 '펄'과 김추자고, 그들의 공백을 메운 사람이 한국 최초의 사이키델릭 가수 김정미다. 그녀는 스타욕이 강했던 선배들과 달랐다. 그것은 아버지가 사장이라는 유복한 환경과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은 출신성분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한 곡을 며칠씩 연습시키며 세세히 요구해도 다 참아내고 그대로 했다. 그래서 나온 '해님', '봄', '바람' 같은 곡들은 대중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 했으나 사이키델릭 음악의 이상을 수용해 낸 훌륭한 곡이라고 믿고 있다.
사이키델릭 뮤직은 그녀에 의해 국내 처음으로 제대로 소개됐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이키델릭 뮤직이란 환각 음악이 아니다. 히피 사상의 궁극이 평화를 지향했듯, 그녀의 음악 역시 마음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키워 낸 가수 중 가장 인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럴수록 현재 진행 중인 CD 복각 작업은 더욱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역시 복각 출반을 기다리고 있는 가수가 임아영이다. 김추자가 떠난 뒤 언니와 함께 사무실 문을 두드렸던 그녀는 수줍음이 많았는데, 대학 졸업생이라 했다. '미련'과 '마른 잎' 등을 담은 음반을 한 장 만든 그녀는 결혼으로 은퇴한 후 소식이 없다. 목소리가 특히 맑고 고왔던 그녀의 노래는 대중적 취향이 아니었다. 여타 대중 가요와 달리 내 노래가 히트 하는 것은 발표 당시가 아니라, 최소한 6개월이 지나고 나서 였다. '펄'은 곡을 발표하고 6개월 뒤에, 김추자는 1년 뒤였다. 그러나 임아영은 한 번 제대로 소개된 적도 없으니 복각 출반이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나는 업소 출연 아니면 거의 하루 종일 사무실에 틀어 박혀 곡을 쓰고 연습을 시켰다.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 특정인과 개인적으로 만날 시간을 낼 수도 없었다. 내가 먼저 노래를 불러 테이프에 담아 주면 그것을 갖고 익혀 오는 식이었다. 며칠 또는 몇 주가 걸려서라도 '완벽하다' 싶을 때 비로소 녹음에 들어갔다.
가수들은 키워주면 모두 나를 떠났다. 내 성격은 점점 더 차갑고 뜨거운 것이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식으로 변했다. 당시 내 성질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나를 음악적으로 모략하는 기사가 어느 신문에 실렸다. 그걸 본 나는 당장 신문사로 달려가 그 기자를 불러 추궁했다. 누가 한 말인 지 알아낸 뒤 당장 달려갔는데, 그 친구가 극구 부인하는 바람에 내가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나를 모략하는 기사들은 72∼73년 집중적으로 실렸는데, 돌이켜 보니 그것들은 74년 금지 조치의 예고였던 셈이다.
주위에 대한 배신감만 쌓여 갔다. 공인이 되고 나서 만인의 공격을 견뎌낸다는 것은 바로 지옥이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해내지 못 할 것 같다. 내가 결국 중용의 도를 찾기까지에는 그런 험악한 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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