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면 영웅이요, 지면 역적' 이라더니 한국테니스의 남녀 간판 이형택(李亨澤·27) 조윤정(趙倫貞·24)을 이끌고 출정한 주원홍(朱元洪·47) 삼성증권 감독이 이런 형국이었다.취지가 아무리 가상하더라도 알짜 선수들을 외국으로 빼가 가뜩이나 스타가 없는 국내 테니스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원성과 질시도 만만치 않으니 성적을 못냈다간 역적소리를 면치 못할 판.
그러나 새해들어 뜻밖에 터진 이형택의 우승은 주감독에게 무거운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한국 테니스의 국제화''라는 20년 소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지난 1월 11일 호주의 ATP(세계남자프로테니스협회)투어 아디다스 인터내셔널대회 결승. 테니스팬은 물론이고 토요일 낮 무심코 TV앞에 앉았던 문외한들까지 꼼짝없이 160분간을 붙들려 가슴 졸여야 했던 혈전이었다.
결국 이형택(당시 87위·현 63위)은 세계 4위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스페인)에게 기술과 힘뿐 아니라 기싸움까지 한치도 밀리지 않는 만점짜리 경기를 펼친끝에 2-1(4-6 7-6 7-6)로 역전승, 한국선수로는 첫 투어대회 우승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
골프의 박세리 김미현 박지은 박희정 최경주가 줄줄이 정상에 오른 것도 대단하지만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골프와 달리 체격과 파워가 월등한 서양선수와 맞대결하는 테니스에서의 우승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에 기적과 같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1월 호주오픈 여자 2회전서 세계 14위 막달레나 말리바(불가리아)를 일방적으로 몰아치다가 다리 경련으로 1-2로 역전패 한 바 있는 조윤정도 이에 앞서 투어대회 2연속 결승진출을 이루며 53위까지 올라 금년내 30위 달성이 유력한 상황.
주원홍 감독은 동인천 중고를 거쳐 성균관대 시절 선배 주창남과 함께 20여차례 복식우승을 했으나 태극마크는 달아보지 못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대우팀에 복귀했다가는 곧 후배들에 밀려 코트를 떠났다. 그리고 84년 장래에 주니어선수를 가르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코치연수를 위해 미국행. 사실상 반도피였다고 본인은 실토한다.
그러나 1년내내 수없이 많은 대회가 열리는 새로운 세상에 눈이 번쩍 뜨이면서 "고만고만한 선수끼리 아웅대는 국내무대는 의미가 없다. 테니스는 직장에서 월급 받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 돈과 명예를 잡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거는 프로종목이다. 꼴찌를 하더라도 우물안을 벗어나 강자들과 부딪쳐야 발전한다"는 신념을 갖게됐다.
1년만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미국 테니스코치 자격증을 따고 돌아와 제일생명 여자팀 감독을 맡은 그는 87년 부산 광안여중 1학년이었던 박성희를 발견하고는 "바로 내가 찾던 재목" 이라며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일생명 팀의 해체후 실직상태에서도 개인적으로 박성희를 지원하며 부모를 설득, 해외진출 동의를 얻어냈다. 박성희는 국내 실업팀들이 당시로는 거액인 5,000만원을 제시했지만 이를 포기했고, 주감독은 대그룹중 유일하게 테니스팀이 없는 삼성을 드나들며 '박성희 프로화'의 스폰서를 맡아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 결국 92년 뜻을 이루었다.
프로선언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죽을 쑤던 박성희는 다행히 2년만에 100위내에 진입하고 95년 세계 6위인 일본의 다테 기미코를 잡으면서 단숨에 57위로 점프했다.
주감독은 박성희의 성공에 용기를 얻어 회사로부터 남자 테니스의 양강인 대학생 윤용일(명지대) 이형택(건국대)에 대한 지원결정도 받아냈다. 당시 여자 30위, 남자 100위가 삼성에 제시한 목표. 100위 목표는 이형택이 2000년 그랜드슬램대회인 US오픈 16강에 성공하면서 50위로 올렸다.
외국선수들과의 체력적 기술적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실전경험과 자신감을 쌓는 길 뿐이었다.
그래서 열렬한 후원자인 동생('벼룩시장'을 발행하는 주원석 미디어윌 회장)으로 하여금 95년부터 국내선수들의 수준에 맞는 총상금 5만달러짜리 벼룩시장배 여자 국제대회를 창설토록 했다. 여고생 조윤정 등을 위한 배려였다. 남자대회로는 소속사에 요청, 삼성증권배 챌린저대회를 2000년부터 3차례 열었고 이형택은 1,2회서 연속 우승하며 세계 상위권 진출의 토대를 닦았다.
주원홍감독의 성공비결은 '남보다 먼저 국제화에 눈을 떴다'는 것 외에 테니스에 대한 열정, 또 자율과 사기진작을 중시하는 특유의 선수관리이다.
그 열정에 감동한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주감독에게 딸을 맡겨 프로진출의 시동을 건 박성희의 아버지 박옥환씨(만화가)는 오늘의 이형택이 있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리고 탁구 여자국가대표팀 감독출신으로서 삼성스포츠단 상무였던 박성인부사장, 테니스 동호인으로서 삼성의 테니스팀 창단에 가교 역할을 한 이철 국회의원 등.
주감독은 선수가 힘든 연습 때문에 운동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을 가장 걱정해 유망주를 발견하면 코치를 찾아가 연습을 적게 시켜 달라고 당부한다.
또 정상급 선수가 되려면 절대 기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짜증까지 받아주며 한편으로는 당근작전으로 동기부여를 한다.
이형택은 이번 투어대회 단식 우승후 상금 4만 8,000달러(계약상 감독몫 20%, 코치몫 10%)외에 삼성으로부터 보너스 1억원, 주감독 동생 주원석회장으로부터 격려금 5,000만원, 주감독에게서 승용차를 받았다. 또 삼성증권 주임에서 대리로 승진했다.
주감독은 이형택의 뒤를 이을 유망주 3명을 집중 조련하고 있다.
현재 주니어랭킹 49위인 석현준(포항고 3)과 190㎝의 장신에 최고시속 201㎞의 서브를 지닌 전웅선, 역시 186㎝로 신체조건이 뛰어난 김선용(양명고 1)으로 , 이형택의 우승후 한껏 부풀어 있다.
전웅선은 마음껏 테니스를 하겠다고 학교를 중퇴한 상태이다. 주감독은 삼성증권이 주니어 육성에 지난해 6월부터 3억원을 지원한다며 "이형택처럼 늦게 프로에 들어가 성공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고 이들은 대부분의 세계적 선수처럼 일찍부터 국제무대를 두들기고 있으니 반드시 이형택을 능가하는 스타가 나올 것" 이라고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유석근 편집위원
주원홍감독 프로필
생년월일=1956년 11월 15일
출생지= 경기 부천
선수경력=동인천중고 성균관대 육군 대우중공업
주창남과 복식조로 20여대회 우승
감독경력=제일생명 삼성물산 삼성증권(현) 남자국가대표팀(99∼2002)
가족=부인 천미숙씨와 1남1녀, 아버지는 초대 무역협회 간사인 주극남옹(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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