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 숭문고(교장 서연호·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국어과목 교사로 부임하면서 도서관 자물통을 하나 받았을 때만 해도 허병두(42·사진)교사는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도서관은 이 학교의 창업자인 서기원씨가 모아둔 50∼70년대의 귀한 책들이 가득했으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버려진 상태였다. 서강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나오고 백석과 이용악의 서정시 연구로 석사학위 논문을 쓴 허 교사는 문학도였지 문헌정보학 전공자가 아닌만큼 도서관을 맡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연배가 드신 행정과장이 "자물쇠만 맡아달라"는 말을 거절할 수 없어 받아든 터였다.그러나 그에겐 도서관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추억이 있었다. 그가 졸업한 대학에서 도서관은 학교의 가운데에 있었다. 어디를 가든 거기를 거쳐야 했다. 당연히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데 그 도서관은 이상했다. 학생들이 책을 찾으면 사서들이 손목을 잡고 일일이 책있는 곳을 일러주었다. 모든 책이 학생들에게 완전 공개된 개가제 도서관이었다. 그가 고등학교 때 드나들던 4.19도서관이나 정독도서관과는 달랐다. 그는 도서관이 좋아졌다.
그 추억 때문에 허 교사는 그 해 6월, 그 도서관의 문을 땄다. 먼지 속에 있는 책들은 이광수 전집, 독립신문 축쇄본, 철학사전, 연감류, 정음사 문고 등 귀하고 좋은 책들이었다. 지금도 숭문고 도서관은 일조각에서 옛날 자료를 찾으러 사람을 보낼만큼 50, 60년대의 귀한 책들을 온전히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당장 학생들이 읽을 책은 드물었다. 그는 도서관을 살리자고 마음 먹었다.
그 때부터 학생들과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해 학생의 날에 맞춰 도서관을 재개관했다. 학생들이 읽을만한 책 목록을 인쇄해서 교실마다 붙이고 도서반 학생들이 빌려보고 싶다는 학생들에게 책을 직접 가져다주었다.
지금 숭문고 도서관은 전국에서 가장 잘 운용되는 학교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힌다. 250평 넓이에 1만여권의 고서, 8,000여권의 신간도서, PC방보다 빠른 컴퓨터 21대, 아늑한 소파와 평상, 열람석 200석 등 학교 도서관이 갖춰야 할 것은 다 있다. 2000년 재개관을 한 후 100여군데서 견학을 다녀갔을 정도이다. 완전개가식이라 누구나 원하는 책을 마음껏 빼서 볼 수 있다. 대출은 때로 1주일에서 두 달까지, 학교 사정에 따라 학생 편의에 따라 조정이 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학생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책누리'로 불리는 도서반원들은 학년당 10명. 고3이 되면 활동이 어려워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과 20명의 학생이 학교 공부하는 틈틈이 도서관 운영을 맡아야 하니 격무라면 엄청 격무다. 이들은 그러나 도서 정리나 대출은 물론 도서관 청소까지 군말없이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매년 도서반원이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서 경쟁률 4대1 정도면 '너무 떨어진 것 아니냐'며 대책을 논의할 정도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가 재미있어요. 자장면 먹고, 축구하는 재미죠"하고 2학년 책누리인 신동우(17)군은 말한다. 책 읽는 것이야 물론 기본이다. "실상 책누리가 되면 도서관 관리를 하느라 다른 학생들보다 책을 더 못 읽게 되요. 하지만 도서관에서 배우는 것은 그 이상이죠. 친구들과 선생님과 선후배간의 정을 배울 수 있거든요. 그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는 대학에 와서 다른 학교 출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됐습니다"고 책누리 출신인 현기동(22·홍익대 법학과 3년 휴학중)씨는 말한다. 물론 그가 구체적으로 배운 것도 있다. 다름 아닌 글쓰기.
"교직원이 해야 할 일을 학생들이 떠맡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 어려움을 상쇄할만큼 가치있는 것을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허 교사는 책누리들에게 지식을 활용하는 법을 일깨워주고자 노력했다. 1999년에는 책누리들만의 체험을 모아 '정보화 시대의 학교 도서관 만들기'(푸른나무 발행) 같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 결과 책누리들은 이 세상에는 문제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같은 문제의식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들의 관심은 다방면으로 열려 있다. 이 책을 쓸 때 전산부문을 도맡아 집필했던 현씨는 법학 전공으로 대학엘 갔고 현재 DVD 전문잡지에 영화평론을 쓰고 있다.
허 교사가 생각하는 도서관은 더 이상 책이 쌓여있는 곳이 아니다. 그가 키우고 싶은 사람은 책에서 얻는 지식을 머리 속에 움켜쥐고 세상이 묻는 질문에 답이나 잘하는 이가 아니다. "교사 생활 20년에 제가 깨달은 것은 세상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단답식 학력고사 때와 비교하면 논술시험은 진일보한 것이지만 주어진 과제 안에서 창의성 없이 이리 저리 논리를 꼬는 것만 가르친다는 점에서 큰 한계를 갖고 있다"며 그 같은 지식 습득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배움을 즐거움으로 느끼지 않고, 배움을 머리로만 받아들이고, 그 결과 공부하면 할수록 자기혐오에 빠진다는 것이다.
허 교사는 이 때문에 요즘 학생들에게 질문을 찾아보라고 가르친다. 제시된 문제 안에서 답이 아니라 문제를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답없는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면 창의적 인간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는 요즘 책누리들과 새로운 구상에 빠져있다. 이들과 책을 만드는 법을 체계적으로 다시 배워보고 그렇게 배우는 과정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 다행히 같은 마포구에 있는 현암사가 지역문화 활성화 차원에서 이들의 작업을 적극 돕기로 나섰다. 출판에 관해 배우겠다면 언제든 필요한 강사를 보내주겠다고 한 것. 또한 마무리 작업을 책으로 내는 것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현암사 형난옥(44) 대표는 "청소년들의 작업이 얼마나 나아갈지는 모르지만 도서관을 지식을 익히는 데가 아니라 지식을 창조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의지 자체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기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감동 일화 2토막
숭문고 도서관의 2기가bps급 컴퓨터 21대는 이 학교 동문인 이근영(80)씨가 2000년에 기증한 것이다. 이씨가 돈을 기증했을 때 허 교사가 설치하고 싶었던 것은 책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자동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자검색대였다. 일일이 도서반출을 점검해야 하는 책누리들의 격무를 줄여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기증자인 이씨가 완곡하게 반대했다. "학생들이 의심을 받는 상황은 옳지 않다"고. 이씨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라도 학생이 학교에서 의심받는다는 상황이 생겨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허 교사는 기증자가 준 물질보다 이 같은 가르침을 더 큰 기증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도서관 일은 책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부터 도서번호를 부여하는 일, 반납한 책을 지정된 장소에 꽂는 일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수많은 잡무의 연속이다. 이 때문에 책누리들에게 봉사점수를 주자는 의견이 교사들로부터 제시됐다. 생활기록부가 대학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 같은 제안은 학생들로서는 솔깃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들은 이 일을 눈에 보이는 가치로 되돌려 받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 맡고자 했다. "교사가 가르쳐주고 싶은 것 이상을 제자들이 실천할 때 정말 교사된 보람을 느낍니다."
■도서관의 아이러니
급식은 편하다?
물론 급식제도가 되면서 학생들의 가방 무게가 줄어들고 학부모들의 일손이 덜어진 것은 사실. 그러나 급식당번을 학생들이 돌아가며 하다보니 휴식시간이 줄었다. 가장 긴 휴식시간인 점심시간에 할 일이 많아지다보니 도서관에서 보내는 여유가 더 줄어들었다.
기증도서가 많으면 좋다?
물론 좋다. 그러나 동시에 어려운 점이 많다. 일손은 한정되다보니 기증도서가 많아지면 신간 구매를 멈칫하게 된다. 일이 너무 늘어나면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 개학을 하며 시인이자 숭문고 교사인 정희성(58) 시인이 캐비닛 2개 분량의 귀중한 책을 도서관에 기증해서 책누리들의 일이 엄청 늘었다.
사서는 있어야 한다?
물론 사서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숭문고 사례에서 보듯 사서가 없는 이 학교는 사서가 있는 어느 학교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문제는 그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꿔나가겠다는 개인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러나 역시 사서는 필요하다고 허 교사는 말한다. 아울러 지금 대학 문헌정보학과에서 학교 도서관에 대해 좀더 많이 가르칠 것도 주문했다.
도서관에서 배우는 것은?
허 교사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이 그걸 이기적으로만 사용하려 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오히려 남을 위해 조용히 해줄 줄 아는 것, 다른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찾아주는 기쁨 같은 것을 도서관에서 얻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서관의 수많은 것들이 기증으로 이뤄졌다는 사실, 그리하여 나도 남들에게 소중한 것을 기증할 줄 아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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