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5일 민주당 중진의원 8명이 서울 여의도 모 음식점에 모여 대책회의를 가졌다. 8·8 재보선 패배로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져 후보교체론이 대세를 점해가던 시점이었다.정대철 당시 최고위원과 김원기 고문이 주선한 모임에는 정동영 김상현 김근태 박인상 장영달 신기남 의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오랜 토론 끝에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노 후보를 계속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이 자리가 노 후보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준 '8인 모임'이었다. 정대철 민주당 대표는 "민주당 신주류가 형성된 최초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임채정 이상수 김경재 정세균 의원 등 중진과 조순형 천정배 추미애 송영길 등 개혁파 의원들이 가세, 여권의 권력좌표는 급속히 노 후보쪽으로 옮겨갔다.
참여정부의 출범은 정치권내 권력구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당내에선 동교동계를 대신해 개혁파 중심의 신주류가 형성되고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세대와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출신이 새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운동권 출신 386세대는 청와대 보좌진으로 입성, 세대교체를 재촉했다.
이남영(李南永) 숙명여대 교수는 이 같은 변화를 주변부 마이너리티 그룹의 중심세력화, 세대간·이념적 권력이동으로 해석했다. 이 교수는 "3김(金) 중심의 지역구도와 기득권 중심의 엘리트주의가 퇴조하고 저항적 개혁세력이 전면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무현 시대 신주류는 일인 보스와 특정지역 기반 아래 뭉친 상도동계나 동교동계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70년대 민청학련 세대부터 통추 인맥, 부산 인맥, 민주당내 개혁파와 친노파 의원, 80년대 386 운동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8인 모임' 멤버의 공통점도 당내 비주류이며, 따라서 권력의 주변부에 있었다는 것 하나 뿐이다.
김용호(金容浩) 인하대 교수는 "과거 특정 세력과 계파에 의한 권력 독과점 체제에서 다원적 권력구도로 재편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념, 지역, 세대로 구분할 수 없는 연합군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정(李在禎) 의원은 "신주류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면서 "굳이 따지자면 선거대책본부에 적극 참여했던 열린개혁포럼 소속 의원들이 주축"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과거 계파에 비해서는 이념지향적이다. 동교동계가 이념 보다는 충성심과 연고 및 서열로 맺어진 반면 이들은 '공통된 가치'를 앞세운다. 이호웅(李浩雄) 의원은 "신주류는 기득권 타파와 탈지역주의, 정치개혁 등 공통의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인 그룹"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지향점과 세대가 다른 만큼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여러갈래로 분화(分化)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신주류의 상층부에는 좌장격인 김원기 고문 등 통추 출신과 민청학련 인맥이 자리잡고 있다. 정대철 대표를 필두로 한 민주당 신주류는 당 대표와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등 요직을 대부분 장악했다. 문재인 민정수석과 이호철 민정1비서관, 신상우 전 의원 등 부산인맥도 급부상했다.
운동권 출신 386 세대는 신주류의 하부 기반이다. 노 대통령의 양팔로 불리는 이광재 국정상황실장과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서갑원 의전비서관, 윤태영 연설담당비서관 등 상당수가 청와대에 입성했다.
민주당내 신주류와 청와대 수석, 386 운동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빈약해 갈등관계가 여과없이 노출될 가능성도 높다. 민주당 관계자는 '급진적인 386 세대가 언젠가 사고를 칠 것'이라고 걱정했다. 반면 386측은 당 인사들이 '언제 보수로 회귀할 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다.
김만흠(金萬欽) 가톨릭대 교수는 "신주류는 지역적 기반은 구주류측에 두면서도 인적구성은 반 DJ 성향의 운동권과 수도권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심각한 괴리현상으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같은 다양성은 신주류의 최대 강점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김만수(金晩洙) 보도지원비서관은 "동아줄은 한 갈래가 끊어져도 전체가 끊기는 법이 없듯이 다양성은 위험분산과 상호견제의 효과가 있다"며 "신주류내 다양한 세력간 경쟁체제는 민주적·효율적인 국정운영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 정치권 진입 운동권
참여정부의 파워 엘리트는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운동권 출신이 상당수다. 이들은 여당내 주류를 형성하고 청와대 비서실도 사실상 장악한 집권세력으로 성장했다. 현재 전체 의원의 25%에 달할 정도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을 기점으로 현역 정치권의 운동권 출신은 크게 4 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김근태 의원과 장기표씨, 손학규 경기지사 등은 이들과 60년대 6·3세대를 잇는 1세대로 분류된다. 현 정부의 상층부를 형성하는 2세대는 민청학련 세대. 유인태 정무수석과 이철 전 의원, 정찬용 인사보좌관, 이강철 전 특보, 이해찬 이창복 장영달 이호웅 심재권 의원, 한명숙 환경부 장관 등이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학생운동을 이끈 '80년의 봄' 세대는 문재인 민정수석과 신계륜 정동영 의원, 유시민씨 등이다. 이호철 민정1비서관 등 학림·부림 세대도 여기에 속한다. 심재철 김부겸 안영근 이성헌 김영춘 의원 등은 한나라당 소속이다.
8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이끈 386세대 중 임종석 송영길 의원과 허인회 오영식 정윤재 고진화 정태근씨는 정치권에 입문했고 이광재 안희정 서갑원 윤태영 천호선 김만수 황이수 등 노 측근 그룹은 청와대로 들어갔다. 김만수 보도지원비서관은 "현실정치를 통해 이상을 실현하려는 운동권내 중도우파"라고 '노무현 386그룹'을 규정했다.
김근태 의원은 "정통성을 가진 운동권 세력이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국가적 역량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 뒤 "집권세력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경험부족을 겸허히 수용하고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사심없는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성규기자
■전문가 진단
노무현 참여정부의 출범과 함께 청와대와 내각, 민주당에서 이른바 '신주류'가 부상하면서 '마이너리티의 약진을 통한 주류세력의 지형 변화'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검증 안된 파격 인사라느니 아마추어리즘이니 하는 일부의 비난도 있지만,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낡은 엘리트 충원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연공서열 중심의 위계질서 타파, 양성 평등, 비주류 소수파의 등용 등 특권층 구조가 파열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전반적으로 정치 엘리트를 재구성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통해 통치의 정상화, 지배의 합리화라는 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구습에 물들은 기성의 정치엘리트에게도 개혁의 자극을 주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민주개혁은 엘리트의 교체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부와 권력을 만끽해 온 우리 사회의 기득권 지배구조가 정치엘리트 차원의 신주류의 부상 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특히 정치 신주류가 정말로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이해를 대표하고자 하는 소신을 갖추고 있는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도 아직까지는 미지수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활성화하는 시스템과 제도를 갖춤으로써 권력관계의 의미 있는 재편을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 엘리트의 교체에만 머무는 것은 '찻잔 속의 돌풍'에 불과하며, 민주개혁의 사회적 분위기 조성을 통한 낡은 정치 청산과 새 정치 실현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완수할 수 없다. 지난 10년간의 민선민간정부 통치 과정이 생생하게 보여준 것처럼, 노무현식 개혁도 엘리트층이 교대하는 데 그친다면 좌충우돌의 파행적 혼란을 거쳐 자기파멸적 퇴행의 길을 밟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지금 우리는 격변과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시장지상주의를 앞세운 야만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라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관철되면서 인간 사회가 더욱 황폐화되는 것은 그 필연적 귀결이다. 아울러 한반도의 불안 상황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위기의 상황을 슬기롭게 돌파하기 위해서는 국정 운영의 책임을 지게 된 새 정치엘리트들의 책임의식이 중요하다. 신주류의 부상에 환호작약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엄중하며, 민주개혁의 시스템과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데도 시간과 힘이 부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과연 이 시대적 과제를 노무현 정부가 제대로 해낼 수 있는지를 똑바로 보면서, 성숙한 비판을 통한 대안의 길 찾기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