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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화코드](3)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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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화코드](3)운세

입력
2003.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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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왜 보냐고? 세상일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서울 종로 2가 인근, 한 사주카페에서 만난 직장인 조모(33·여)씨. 그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남 몰래 골목길로 점집을 찾아 들어가던 시대는 지났다. 사주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기다리면 청바지 차림 30대 중반의 점쟁이가 카운셀링 하듯이 편안하게 사주를 봐준다"고 말한다. 서너 곳의 사주카페가 잇대어 있는 이 일대는 화려한 카페식 인테리어를 갖추고 차를 판다. 점집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고, 이 곳을 드나드는 사람에게서 과거의 쑥스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궁합 1만원, 타로카드 1만5,000원, 사주 2만원 등 가격이 적힌 '점 메뉴판'은 더 이상 점쟁이의 눈치를 보면서 복채를 얼마나 쥐어줘야 할지 하는 고민을 없앴다.

반말로 야단치듯 미래를 일러주는 점쟁이는 보기 힘들다. 이곳의 역술인은 '인생 컨설턴트'나 '카운셀러'로 불리기를 더 원한다. 20, 30대가 주 고객으로 평일에도 저녁 7시 이후는 테이블이 꽉 찬다.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는 최근 신세대들이 즐겨 찾는 점집들이 몰리면서 '점술 밸리'로도 불리고 있다. 이곳에도 환한 조명과 신비로운 인테리어로 치장한 점집 11곳이 들어서 있고, 골목 곳곳에서 50여 곳의 사주카페가 성업 중이다. 지난해 이곳에 문을 연 역술인 김경린씨는 "적성을 문의하러 오는 고등학생이 많고, 심지어 중학생들도 거리낌없이 드나든다"고 귀띔한다.

'양지'로 나온 운세 문화의 약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백화점 문화센터와 대학 부설 사회교육원은 사주, 관상이나 풍수를 배우겠다는 주부들로 꽉꽉 들어찬다. 인터넷에는 운세 사이트가 넘쳐 난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현대, 롯데, 신세계 등 메이저 백화점 문화센터는 대부분 사주, 관상 등 운세 관련 강좌를 개설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민의 80%가 1년에 한두 번 씩 점집을 찾는다"는 박형용 한국역술인협회 사무총장의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운세는 이제 이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예전에도 운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운세 문화가 아침마다 신문의 운세란을 들춰보거나 은밀히 점집을 찾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 머물렀다면, 이제 한국의 운세 문화는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맹렬하게 확산되어 나가고 있다.

올 초 온 국민을 '대박 꿈'에 젖게 했던 로또 복권 신드롬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퍼마켓에서, 은행에서, 지하철역에서, 길거리 어디서나 '인생 역전'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내 운을 바꿔보라고 유혹한다. 814만분의 1 확률의 1등 당첨 숫자를 알아내기 위해 그보다 확률이 떨어지는 점집을 찾는 세상이 됐다. 평균의 한국인도 이제는 복권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냉담한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게 됐다. 운세를 삶의 중요한 변수로 보는 인생관이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발 빠른 기업들 사이에서 운세는 이미 수익성 높은 문화상품이나 콘텐츠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다. 지난달 서울 시내 특급호텔에서 열린 한 여성 월간지의 창간 기념 행사장에는 이색 풍경이 연출됐다. 행사장 네 모퉁이에 고객에게 점을 봐주는 간이 부스가 설치된 것. 잡지사 사장의 기념사가 흘러나오고 있는 데도 아랑곳 않고 부스 앞에 늘어선 줄이 계속 늘어날 정도로 점은 큰 인기를 끌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업체 관계자는 "홍보대행업체나 마케팅업체는 이미 운세를 판촉·홍보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며 "사주, 타로카드 등은 고객들이 선호해 행사에 꼭 들어가는 아이템으로 정착했다"고 말했다.

인터넷 운세 사이트는 90여개에 달한다. 운세전문 사이트 1위를 자부한다는 사주닷컴에는 매일 20만명이 접속한다. 월 매출이 3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정용 사주닷컴 부사장은 "전체 회원 70만명은 마니아층으로 꾸준히 사이트를 방문한다"고 말했다. 이 업체는 이달 중순께 일본의 통신업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운세 콘텐츠를 수출할 계획도 갖고 있다. "지식사회에서 앞선 정보는 돈이 되고 인생의 지표가 된다." 역술사이트 애스크퓨처닷컴의 이수 대표는 역술 콘텐츠가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초보적 수준에서 벗어나 증시의 등락, 환율 전망, 부동산 운세까지 점치는 예측산업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는 점성술 펀드가 성업 중이고 예언을 사고 파는 시장까지 형성돼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운세 콘텐츠는 하루 평균 250만 페이지뷰를 기록하고 있다.

"운세는 빼놓을 수 없는 콘텐츠"라는 다음 관계자의 말처럼 이미 운세 콘텐츠는 사회저변에 뿌리내렸다. 무엇보다 '인생역전'이라는 구호가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운세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운세 열풍 왜?

운세(運勢). '운이 닥쳐오는 기세'라고 풀이되는 이 말에 사람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운세가 중요시되던 사회는 불안한 사회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언서의 하나인 '정감록'이 성행했던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로 조선의 사회 체제가 무너질 때였다. 극심한 사회 변동으로 추스르기 어려울 정도로 삶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운(運)'에 눈을 돌린다.

전문가들은 IMF체제의 엄청난 사회적 충격이 지금 한국의 운세 문화를 촉발시킨 계기였다고 말한다. 물론 농경사회가 30∼40년 만에 산업사회, 정보사회로 바뀌면서 이뤄진 급속한 사회 변동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알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는데 불확실성이 높은 전환기일수록 이런 욕구가 커진다"면서 "명예퇴직 등 IMF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점술 문화를 팽창시킨 요인"이라고 말했다.

특히 20·30대의 젊은 층에 운세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이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혼 연령이 높아지면서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불안한 사춘기가 연장된 데다, 취직을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인터넷의 빠른 속도에 길들여진 이들은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며 기다리기보다는 당장 운명을 알고 싶어하는 심리가 강하다.

안전에 대한 인프라가 부족한 것도 원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세계 제1위의 교통사고율,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형사고 등으로 한국 사회의 불안감 정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장석만 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은 "중산층 사이에 운세 문화가 일반화하고 있는 것은 삶이 헛헛하기 때문"이라면서 "운세가 불안감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쥐약 먹고 죽지 마. 3년만 버티면 운이 터진다니까." "이혼할 팔잔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팔자가 그렇다니까." 사업이나 결혼에 실패한 이들에게 점술가의 한 마디가 큰 위안이 되는 현실이다.

/남경욱기자 kwnam@ hk.co.kr

■점치는 방법은

운세를 점치는 방법도 신세대 취향에 따라 변해간다. 고전적인 사주, 관상, 궁합 외에 점성술 등 온갖 서양 점술이 유행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압구정동 점술 밸리에서는 타로카드, 수정구슬, 보석점, 동물점 등이 인기다.

78장의 카드 배열로 과거와 미래를 점치고 예언하는 타로 카드는 지난 해 미국 워싱턴 일대를 공포에 휩싸이게 한 연쇄 저격 살인범이 '나는 신이다'라는 글을 이 카드에 써서 남기면서 더 유명해졌다. 인생의 큰 흐름을 점치는 22장의 카드와 사소한 일을 맞추는 56장의 카드에서 몇 장을 뽑아 해석하는 방식이다. 카드 그림만도 수백 가지이고 점치는 사람에 따라 해석하는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수정구슬점은 점치는 사람의 영감에 의존한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영매 오다매로 연기한 우피 골드버그가 수정구를 만지면서 점을 치는 장면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기를 증폭시킨다는 수정구를 쓰다듬으면서 떠오르는 영감을 얘기해 준다. 보석점은 돌이나 수정, 보석 등에 특수 문자를 새겨 넣고 각 문자마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길흉화복을 점친다. 원숭이 호랑이등 12가지 동물 중 한 종을 선택토록 한 후 동물의 성향으로 고객의 성격과 운세, 궁합, 등을 알려주는 것이 동물점이다.

새롭고 신기한 것을 찾는 신세대의 욕구에 맞춰 점술이 아닌 것까지 운세를 보는 도구로 등장했다. 서양에서 우물을 찾는 다우징에 쓰이는 추인 펜듈럼으로 점을 치거나, 동양의 고전 술법인 '기문둔갑'을 점으로 둔갑시킨 경우도 있다. BC 3000년 경에 등장해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다는 동서양의 온갖 점술이 수입되고 있다.

/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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