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吳明) 아주대 총장의 교육부 총리 내정 사실이 알려진 지난달 25일. 전교조, 참교육 학부모회 등 교육단체들은 일제히 오 총장을 '반개혁 인사'로 낙인 찍고 밤샘 농성에 돌입했다. '오명 절대 불가'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받은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27일 교육부총리를 제외한 내각을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 참여연대의 고발로 최태원(崔泰源) SK(주)회장이 구속되자 한화, LG, 삼성 등 재계가 몸을 낮추며 "시민단체가 검찰보다 더 무섭다"고 말하고 있다.시민사회가 권력의 한 가운데로 이동하고 있다. 며칠 또는 몇 달 만에 장관과 재벌총수를 날리고, 대규모 국책 사업의 방향을 튼다. 역대 정권의 어떤 실세도 이만한 힘을 휘두른 적은 없다. 권력 외곽의 비판 세력에서 관료 그룹, 정치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권력의 한 축으로 들어선 것이다.
'참여정부'도 정권 내 힘의 공간을 시민단체가 채워주기를 바라고 있다. 파워그룹화를 적극 유도하면서 집권세력 속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시민단체연대회의 신년하례식에서 "시민단체가 없었다면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이라고 선언했다. "새 정부와 시민단체가 서로 권력과 정당성을 부여하며 개혁의 전차를 함께 몰고 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정찬용(鄭燦龍) 청와대 인사담당보좌관, 허성관(許成寬) 해양수산부장관, 강금실(康錦實) 법무부장관 등 권력 핵심으로 진입한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정권과 시민사회의 '살 섞기'를 재촉한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물론 권력의 내부로 진입했다는 점을 부인한다. 시민단체 인사 발탁은 노무현 정부 인재 풀의 한계 때문이거나, 인재 등용이 저변으로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참여연대 이태호(李泰鎬) 정책실장 등은 "시민단체의 권력화로 보는 것은 과대평가"라고 잘라 말했다.
시민단체는 이전에도 입법청원, 공청회, 정부 위원회 등을 통해 국가정책에 개입해왔다. 정부 위원회는 민관이 직접 소통하는 제도적 장치지만 시민단체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경실련 고계현(高桂鉉) 정책실장은 "위원회에 참여, 숱한 의견을 개진하지만 정작 결정은 정부 마음대로"라며 "심의, 의결 권한이 없는 의견 수렴 차원의 위원회는 명분 쌓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참여연대의 이 실장도 "정책지향에 있어서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요직에 있으면 시민단체의 입장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잇따른 장관직 진출에 관료사회도 콧대를 꺾고 현실을 받아들인 지 오래다. 농림부 전경구(全敬求) 사무관은 "새만금 사업 공청회는 언제나 환경단체와 관료 사이의 싸움판이었다"면서 "소모적 논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수질개선 대책 등 성과를 낳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신대 송주명(宋柱明) 교수는 "정부고위직 진출과 관료의 독점권 파괴는 정부와 시민단체의 파트너십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관료와 환경단체, 전문가 15인으로 구성된 환경부의 '경유차 환경위원회'는 이 같은 파트너십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된다. 환경연합의 김혜정(金惠貞) 법률센터 사무처장은 "경유승용차 배출가스 허용기준 등 경유차 문제 전반에 대해 시민사회가 정책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한 것은 새 지평을 연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권력의 부상은 책임, 견제, 그리고 이념의 정체성 등 문제점들도 함께 부각시키고 있다. 정책은 파트너십으로 결정하더라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공유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의약분업은 시민단체가 나서서 중재, 합의안을 이끌어 냈지만 그 뿐이었다"며 "이후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어느 단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수수방관했다"고 말했다. 또 인터넷과 시위 등을 통해 표출되는 시민사회의 영향력은 제어되지 않는다.
참여정부에서 시민사회권력의 장래는 보장돼 있다. 청와대의 천호선(千皓宣) 참여기획비서관은 "정책 입안단계에서부터 시민사회 참여를 보장할 것"이라며 "온·오프라인 공청회에서 주요 정책초안에 대해 토론을 하고, 실제 정책에 반영되도록 제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이 같은 정책결정시스템을 전 부처로 점차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정부와의 인적결합, 정책결정 참여 등으로 시민사회는 새 지평을 맞았다. 동시에 더 이상 '시민'이라는 이름 만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는 시기도 도래하고 있다.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 盧정권과 관계설정 고민
'권력의 동반자인가, 감시자인가.' 노무현 정부를 바라보는 시민운동 내부의 고민이다.
새 정부는 친 시민단체 성향을 보이고 있고, 정책지향이나 인적구성 면에서도 큰 차별성이 없다. 그러면서도 권력기반이 취약해 역대 어느 정부보다 시민사회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는 게 고민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시민운동 내에서는 정부와 시민운동이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할지 엇갈린 입장이 나온다. 노무현 정부와 연대, 협력해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연대론'과 시민단체 본연의 비판과 감시의 고삐를 늦춰서는 개혁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견제론'이 혼재돼 있다.
경실련이 1월17일 발표한 '새 정부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입장'이라는 성명은 이 같은 고민의 산물이다. 경실련은 성명을 통해 "새 정부와의 비판적 협력과 감시라는 본연의 긴장관계 이상의 어떤 관계도 맺을 의사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경실련 관계자는 "국민의 정부하의 시민운동은 권력에 대한 견제기능을 제대로 수행치 못해 국정실패를 막아내지 못했다"면서 "이번 성명은 시민운동의 반성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민사회의 자아비판은 보수세력과의 대결에 몰입한 나머지 정부를 비판의 대상이 아닌 동지로만 의식했다는 데 모아져 있다.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친 시민단체 성향을 갖고 있더라도 어떠한 특권을 요구하거나 받지 않을 것"이라면서 "정치적 중립성을 갖고 권력의 성역에 대해 냉정하게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참여연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현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과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전문가 진단
시민사회운동 진영이 관료주의, 전근대성, 천민성, 사회적 병리 등의 해소는 물론 정치세력화까지도 모색하고 있다. 정치개혁시민연대와 여야정당을 포괄한 정치개혁 범국민협의회를 만들어 정치권력의 서식지를 개혁하고 경제·재벌·언론 개혁을 선도하며 수구 기득권층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민사회권력은 기폭제로서 작동하고 있다. 이는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사회운동이 총체적으로 폭발하여 6공화국,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양적인 성장과 내용적인 발전을 거듭해 온 결과이다.
노무현 정권은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형성된 정치권력이다. 권위주의와 인권탄압에 저항하며 새롭게 형성된 시민사회가 정치권력을 생산하는 결정적인 부문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노무현 정권은 출범후에도 시민사회가 정권운영의 추동력을 제공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참여정부라는 자기 호명 속에는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 외에 시민사회운동의 지지와 연대를 강하게 요청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지향과 사회경제 각료들의 성향은 시민사회권력의 민주적 발전에 희망적이지 만은 않다. 특히 이번 3·1절에 경쟁적으로 치룬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행사는 앞으로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서구의 그것과 비교할 때 압축된 성장을 하고 있다. 100∼200년에 걸친 서구의 시민사회 형성과 권력화 과정이 불과 수십년 동안에 진전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내용면에서는 생각만큼 그렇게 압축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서구에서는 시민사회권력이 스스로 생산한 진보(개혁)정당을 중심으로 사회변화를 일으키며 민주적 자산을 축적해 왔다. 우리의 시민사회는 이제 권력화 과정을 걷고 있으며 아직도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는 만만하지 않다. 나아가 진보(개혁)적인 수권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이념으로나 대중적으로 험한 역정을 거쳐야 한다.
세계사회포럼이나 세계적 반전평화운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하는 총체적인 사회운동의 전지구적 단결과 전진을 실천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운동도 계급적 진보운동과의 의제 공유, 방향 조율, 공동의 권력형성 등을 통해 민주적인 시민사회권력으로서의 자리 매김을 확고하게 해 나가야 할 때다.
김 상 곤 한신대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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