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강 여관 9층에서 바라본 평양 시내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짓다 만 105층짜리 유경호텔이 밤하늘을 찌르는 듯 솟아 있고, 신시가지 고층 아파트군의 윤곽만이 밤의 스카이 라인을 희미하게 그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글씨의 구호들은 반짝거렸다. 첫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 창광거리, 승리거리 등 대로의 가로등은 한 쪽만 불을 밝혔다. 버스도 승용차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교통신호등도 없다. 네거리 가운데 부동자세로 선 여자 교통경찰은 마치 로봇 춤을 추듯 90도 손짓으로 차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평양의 첫 인상은 이렇게 다가왔다.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체류 기간이었다. 한국일보 취재진은 본사 주최로 2월 20∼25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남북학자 공동 토론회 및 사진·자료 전시회 취재 차 평양을 다녀왔다.
서울에 돌아오자 사람들은 한결같이 물어보았다. 평양에도 봄이 왔더냐고. 무엇이 궁금한 건지 잘 안다. 국내 언론들은 대북 폭격 시나리오를 운운하는 미 언론들의 보도를 전하고 있었다. 긴장과 위기감은 서울에서 오히려 더 피부로 느껴졌다
평양에 봄은 아직 멀었다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애매하게 춘래불사춘이라고 얼버무릴까. 솔직히 평양에서의 7박8일과 서울에서의 감(感)의 시차는 기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취재할 수 없던 점도 긴장의 정체와 실상을 바로 보기에 역부족이었다.
평양 도착 다음날인 19일은 마침 우수였다. 대동강 물이 풀렸는지 궁금했다. 아침을 먹고 안내원의 허락을 받아 호텔 옆 보통강가에 산책을 나갔다. 보통강은 대동강의 지류다. 강물은 가장자리만 살짝 얼고 잘 풀려 있었다. 아침 표정은 밝고 활기찼다. 자전거와 전차를 타고 출근하는 시민들, 달리기를 하는 몇몇 사람들…. 강 가운데의 작은 섬에서는 두 무리가 열심히 축구 경기를 하고 있었다.
옥류관에서 고기와 냉면으로 점심을 잘 먹은 일행은 모란봉 을밀대에 올랐다. 갑작스런 을밀상춘(乙密賞春)의 시혜라니. 눈이 호강을 누렸다. 모란꽃 봉오리를 본 것은 마음의 눈이었을까. 을밀상춘은 평양8경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을밀대에서 굽어보는 평양은 환하고 평화로웠다. 25층이 넘는 아파트군인 평양신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대동강은 유유히 흘렀다.
주변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을밀대 아래 잔디밭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전차 운전사 20여 명이 야유회를 나왔다. 이들은 우리가 다가가자 '우리는 하나' 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한 잔 했는지 남녀 모두 얼굴에 꽃이 피었다. 이들은 카메라와 취재노트를 들이대자 조국통일과 반미 구호를 외쳤다. 모란봉을 나서는 도로 변에는 '미국의 핵 전쟁 도발 책동을 짓부시자' 라는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 '내 나라 제일로 좋아' 라는 구호를 써붙인 버스가 지나갔다.
평양 시가지에 늘어난 반미 구호들처럼 북한 인민들의 반미 감정은 고조돼 있었다. 호텔이나 상점에서 만난 사람들은 미국이 자신들의 목을 죄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중유 공급이 중단된 이후 가로등을 한 쪽만 켜고, 공장의 가동 시간을 줄이고, 인민들은 알아서 절전하고 있다고 한다. 전력난의 심각함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한 당국자는 "우리에게 핵은 없다. 발전소 재가동은 전력을 얻기 위한 자위조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평양에서 군사적 긴장의 기미는 느낄 수가 없었다. 등화관제와 군사훈련은 통상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 안내원은 외국 언론 특파원들이 전하는 평양의 긴장은 과장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우리는 오랫동안 미국의 경제봉쇄 속에서 견뎌왔고 또 견딜 것이다. 동요하거나 두려운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다만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先軍) 사상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나 방송, 구호에서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군이 모든 것에 앞서고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선군'의 이념은 북한 정치사회의 핵심이 됐다. 그들 말로는 주체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보루이다.
보통강 여관의 국제전화 안내책자에는 111개 국의 국가 코드가 적혀 있었다. 딱 두 나라만 빠져있다. 미국과 한국이다. 인터넷도 단절돼 있어 기사 송고는 온 길처럼 베이징(北京)을 거쳐야 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식(式)대로' 산다.
평양 사람들은 친절했다. 늘 미소로 맞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북미나 남북 관계, 핵 이야기만 나오면 대답은 일사불란했고 전투적이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다.
평양에 봄은 왔는가. 기자는 귀로의 고려민항 안에서 북녘의 산하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있는 답변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대동강변의 능수버들에는 물이 올랐고, 인민들은 더 많은 구호와 결의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평양=한기봉기자 kibong@hk.co.kr
사진=최종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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