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참여 정부는 국가발전 프로젝트의 하나로 '동북아 허브(hub)' 구축을 제시했다. 인천 송도에 IT(정보통신)를 중심으로 하는 'R&D 허브'를 만들어 동북아 중심국가로서 발돋움하겠다는 것이다. 비좁은 국토, 부족한 자원, 협소한 시장 등 태생적 한계를 지닌 한국으로서 글로벌 시대의 무한경쟁을 뚫고 선진 경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원, 기술, 인력이 오고 가는 허브 구축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되고 있다. 하지만 동북아는 이미 'IT 허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통적인 물류와 금융의 중심 축이었던 싱가포르는 물론, 아시아의 신흥 강호 중국, 동남아 대국 말레이시아, 대만 등이 모두 저마다 동북아 허브 선점을 노리고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칫 망설이거나 머뭇거릴 경우 중심국이 아니라 영원한 주변국으로 몰락할 수 있는 급박한 시점이다. 한국일보는 현지 취재를 통해 새 정부가 추진중인 IT 허브의 성공조건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싱가포르 남쪽 주롱 타운가 8번지. 창이 공항에서 45분, 그리고 시내 중심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이 지역에는 요즘 노란색 가건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바로 싱가포르의 미래가 달려있는 '원 노스(One North)' 프로젝트의 현장이다.
세계 유수의 IT 및 생명공학 연구소와 산업체가 집결된 'R&D 허브'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15년간 총 150억 싱가포르 달러(약 10조5,000억원)가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는 북위 1도 지점에서 펼쳐지고 있어 '원 노스'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개발을 맡고 있는 싱가포르 토지개발공사(JTC)는 '워크(Work)', '리브(Live)', '플레이(Play)' 등을 기본개념으로 세웠다. 일과 생활, 휴식이 한 자리에서 해결되는 복합연구단지를 표방하며 200만 ㏊규모의 연구동과 비즈니스 시설을 제외하고 나머지 60% 이상의 공간을 수영장 골프연습장 등 레저시설과 식당 영화 공연장 등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설계했다. 입주자들의 편리를 위해 지하철 역 2개가 들어서도록 했고 학교와 종합병원도 5분 내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둘 예정이다.
JTC의 치아 콴 유 선임 사무관은 "6만여 연구인력을 비롯해 가족까지 모두 13만여명이 거주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며 "1997년 처음 구상을 발표한 후 치밀한 준비를 거쳐 2001년 12월 본격적 공사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싱가포르가 전통적인 물류·금융 허브로 군림해왔지만, 물류와 금융 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면서 "가치 창출이 가능한 첨단 산업을 통해 21세기에도 아시아 허브의 지위를 이어갈 것"이라고 프로젝트 추진의 의미를 밝혔다.
오랫동안 경제의 성장엔진으로 작용했던 다국적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 등을 이유로 하나 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등 주변 국가로 거점을 옮기자 싱가포르가 발 빠르게 찾아낸 돌파구가 바로 'IT 허브'로의 변신이다. 싱가포르는 사실 1990년대 초반부터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정책을 펼치며 IT를 비롯한 생명공학 등 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의 육성과 유치에 힘을 써왔기 때문에 변신할 수 있는 기반은 이미 갖고 있는 셈.
96년부터 전국을 초고속 광대역통신망으로 연결하는 '싱가포르 원' 계획을 추진해왔고, 2000년부터는 해운 항만 도로 등 국가 기반시설을 정보화하는 'infocomm 21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또 싱가포르에 없는 첨단기술을 가진 해외기업이 신규투자를 할 경우 5∼10년간 25.5%에 이르는 법인세를 면제해주고 국내 중소기업이 IT 관련 인프라 구축에 나설 때에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싱가포르 한국벤처지원센터(KVAC)의 김영(金嶺) 소장은 "똑 같이 10개의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도 허브가 없는 나라가 1∼2개를 팔 수 있다면 허브가 있는 나라는 수십 개를 팔 수 있다"면서 IT허브로서 싱가포르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
'불독 같이 물고 카나리아처럼 말하자'는 모토에 따라 세계 3,300여개 기업과 220여개 다국적기업의 지역본부를 유치한 싱가포르 외자유치의 사령탑 경제개발청(EDB)은 요즘 IT 허브 구축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EDB의 벤자민 고 사무관은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 중심국가로 탈바꿈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며 "첨단기술을 갖고 있는 다국적기업을 유치, 싱가포르에서 세계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싱가포르가 세계 기업인들에게 기업 활동하기 편한 나라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어디서든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외국인들이 공항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택시 운전사는 물론, 호텔종업원 심지어 청소부까지 영어가 통한다.
서울만한 면적에 골프장만 무려 13개, 외국인학교 26개나 되는 것도 다 외국인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한달 전에 통보만 하면 해고할 수 있는 유연한 고용시스템도 다 외국기업이 마음 놓고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이 된다.
LG전자 싱가포르 지사의 변동승(邊東乘) 지사장은 "65년 독립 이후 외국기업 유치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공무원들도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돼 있다"면서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싱가포르 관료 서비스 수준은 최고"라고 말했다.
IT 허브 구축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고급인력의 양성. 싱가포르는 이를 위해 2000년부터 인시아드 와튼, 존스홉킨스 대학원 등 세계적인 교육기관의 분교를 적극 유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또 세계 최초의 복제양 돌리의 연구팀장이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과학자 앨런 콜맨과 위암억제 유전자를 발견한 일본 연구진을 초빙하는 등 첨단 산업 관련 스타 과학자들의 영입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
/싱가포르=박천호기자toto@hk.co.kr
■中·대만·말聯이어 한국 뒤늦게 합류
21세기 벽두부터 동북아에서 '아시아의 허브'를 선점하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시아 허브를 둘러싼 지각변동의 진원지인 중국은 금융·물류 허브로 자리잡은 상하이에 이어 중관춘에 'R&D' 허브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말레이시아와 대만도 각각 사이버자야와 신주를 IT 허브로 개발하며 경쟁에 뛰어 들었다.
중국의 급부상과 말레이시아, 대만 등 주변 국가의 변신에 자극을 받은 아시아의 허브 맹주 싱가포르도 최근 물류·금융 중심지에서 첨단산업 중심으로 변신을 서두르며 살길을 찾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인천 송도에 IT를 중심으로 'R&D 허브'를 구축한다는 구상을 내놓았지만 이들 경쟁자들은 전략 수립은 오래전에 끝났고 벌써 단지 조성에 들어간 상황이다
현지에서 만난 관련자들의 태도는 사활을 건 경주에 나선 것처럼 한결같이 비장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외국기업에 대한 혜택과 지원들을 줄줄이 늘어 놓으며 "기업이 활동하기에 최고 수준의 환경을 보장한다"고 장담했다.
싱가포르 국립대의 신장섭(申璋燮) 교수는 "한국이 외환위기를 잘 넘겼지만,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제조업 기반은 중국에 밀리고, 첨단기술에선 일본에 치이는 처지가 될 수 있다"면서 허브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치열한 허브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공항 항만 등 기본적 하드웨어와 외국기업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 고급인력 확보, 추진 주체의 전략적 사고 등 소프트웨어는 물론,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
신장섭 교수는 "한국이 비록 늦게 시작했지만, R&D와 마케팅에 상당한 비용을 투자해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등 1T 분야 경쟁력은 만만치 않다"면서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은 경쟁국에 비해 광대한 중국시장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점이 있는데다 개성공단 등과 연계하는 북한 변수도 갖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략적인 판단에 따른 선택과 집중의 원칙이다.
싱가포르 IT기업 'IT WIRELESS'의 샘 치 호 선임연구원은 "허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한국은 IT 관련 인프라를 이미 충분하게 구축한 만큼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박천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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