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역할은 한마디로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의 여러'인간적인'문제까지도 상담하고 고민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하는 '서홍관교수의 진료실 풍경'은 83년 의사면허를 받은 이래 20년동안 환자를 진단. 치료해 온 가정의학과 전문의의 생생한 진료 이야기입니다. 서교수는 "독자들에게 건강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게 하고 진료실을 통해 사회와 인생의 단면까지도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57년 출생 ▲ 83년 서울대의대 졸업 ▲ 95년 서울대에서 의학박사 학위 ▲ 95∼96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립의과대 연수 ▲ 현재 인제의대 가정의학과 주임교수 겸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과장, 한국금연운동협의회,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 대한의사학회 이사 ▲ 85년 창작과 비평 통해 시인으로 등단,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49세 된 남자가 부인과 함께 찾아왔다. 종합검진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질문을 해보니 별다른 특이한 증상은 없었다. 나이가 나이니만치 정기검진한다는 기분으로 종합검사를 시행했고, 다행히 모두 정상이었다.
설명을 마치고 진료를 끝내려는 순간에 "한 일 년 전부터 피로가 자주 오고 하체가 힘이 없어요"하는 것이 아닌가.
남자는 노래방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저녁부터 노래방을 지키고, 새벽 2시에 집에 들어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낮 12시까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나와서 골프 연습장에서 운동을 한 뒤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노래방을 지킨다는 것이다. 부인은 아침에 나가서 저녁까지 노래방을 지킨다고 하였다. 잠은 잘 자는지, 식사는 잘 하는지 물어보았으나 모두 좋다고 하였다.
만성적인 피로감을 호소하는 경우에 의사들은 우선 환자가 과로하고 있지나 않은지 물어보게 된다. 과로하지 않는다면 혹시 무슨 병이 숨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미 검진 결과는 모두 깨끗하지 않았는가.
이럴 때는 그 사람이 우울증은 없는지 알아내야 한다. 우울증 여부를 알아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우울하냐고 물어보면 된다. 그리고 사는 재미가 없느냐고 물으면 된다. 사는 재미가 없고, 우울하다면 우울증이 있는 것이다.
"요즘 무슨 일이 재미있어요? 즐거운 일이 뭐죠?"
"글쎄요…."
"그럼 우울할 때가 많아요?"
"(망설이다가) 네…."
옆에서 부인이 참견한다. "아니 당신이 뭐 우울할 게 있다고 그래…. 운동도 하고,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남편의 침묵)…."
"혹시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 해보신 적 있어요?"
"네…. 있지요." 부인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말을 못하기 시작했다.
"혹시 어떻게 죽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네…."
"어떤 방법이었죠?" 그 남자는 말없이 목 매다는 시늉을 했다.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떤 것으로 목을 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었어요?"
"사람 없는 야산이 좋겠지요."
"구체적으로 자살을 시도해보시거나 사전 답사하신 적이 있었나요?"
"그건 아닌데 등산을 하다가 이런 데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해봤지요." 이때부터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알고보니 이 분은 꽤 큰 회사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하다가 IMF 사태때 퇴출당하여 놀다가 노래방을 시작했다고 했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수익이 원래 받던 월급보다도 많고, 나름대로 안정은 찾았다고 했다.
그러나 노래방한다는 것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있어서 만족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들을 만나도 노래방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냥 지내"하고 얼버무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친구나 친척들을 만나는 일도 꺼리게 되고, 등산을 가도 혼자 가게 되는 등 외톨이가 됐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우울해졌고, 이제는 성생활에도 관심이 없어져, 한달에 한번 하기도 힘들다고 하였다. 발기가 안되는 것이 아니라 성욕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부인은 남편이 그런 상태에 이른 것을 까마득히 모르는 상태였다.
우울증은 이처럼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주변 사람 중에서 만사를 시덥지않아 하고, 말이 줄어들고, 잠이 늘거나 불면증에 시달리고, 식욕이 없어지고, 성생활을 귀찮아 하면 혹시라도 우울증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인생을 정리하는 기미가 있고, 자기가 아끼던 것을 남에게 주는 경우가 생겼다면, 그 사람이 혹시 우울증이 있지는 않은지 가족들은 꼭 살펴야 한다.
우울증은 상담치료를 하고, 약물을 투여하면 빠른 시간 내에 좋아질 수 있지만 병세가 악화되면 자살을 시도해서 생명을 잃고 마는 무서운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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