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골칫거리였던 서원의 폐해가 후기 들어서가 아니라 중기부터 사회문제로 대두했음이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유교적 전통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성균관대 직원 모임 보인회(輔仁會)가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경북·강원지역 59개 향교의 기문(記文)을 분석한 결과 드러났다.기문은 공교육기관이던 향교 건물을 새로 짓거나 중수할 때마다 유명 인사들이 그 경과나 관련 사실을 적은 일종의 기념사. 따라서 기문에는 당대 지식인들의 자긍심, 유교의 가르침을 현실사회에서 실천하려는 선현들의 정성과 노력이 담겨 있다.
보인회가 기문을 국역해 펴낸 '교궁기집록(敎宮記輯錄)- 우리 옛 학교, 그 현장을 찾아서' 에 수록된 '원주향교 중건기'에는 1600년대 초반부터 서원의 폐해가 지적돼 있다. 허균(許筠·1569∼1618)이 1609년에 작성한 이 글에서 "문치(文治)가 지나치게 성하다 보니 여러 고을 선비들이 앞 다퉈 모방해 서원을 세웠고, 서원의 유생들은 토지를 넓히고 곡식을 불리는 데 힘쓰고 고을의 권세를 독차지해 방자하게 위세를 부리니 관리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또 "조정에서 세운 향교는 도리어 버려진 곳이 되어 요행히 병역이나 면해 보려는 자들로 채워지니 사우(祠宇·사당)는 무너지고 궁정은 풀이 무성하여 마치 사람이 없는 듯하다"고 공교육의 쇠퇴를 한탄했다.
기문 채록 작업을 해 온 권경열씨는 "이런 내용을 통해 조선 후기 당쟁(黨爭)이 심해지면서 서원이 사림의 세력을 키우는데 이용된 결과 향교가 제 구실을 못하고 무너졌다던 통설보다 1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시기에 이미 서원의 폐해가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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