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상(文喜相) 청와대 비서실장은 얼마전 밥을 먹다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달려간 적이 있기 때문에 요즘 항상 긴장하고 산다. 관심 있는 현안이 생기면 언제 어디서든 토론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노 대통령이기에 문 실장이 한층 분주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대통령과의 토론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문 실장은 요즈음 자정 무렵까지 이런 저런 서류를 뒤적인다.
역대 정권에서 비서실장은 '권력의 2인자'로 통했던 경우가 많았지만 문 실장에게서는 아직 권력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새로 개편된 청와대 비서실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그의 주관심사다. 문 실장은 "비서실 운영에 대해 대통령과 나의 생각이 어찌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노 대통령도 놀라움을 표시하곤 한다"며 은근히 대통령의 신뢰를 강조한다. 기본적으로 청와대가 각 부처를 장악해서는 안되고 권력분산의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에게 있어서 문 실장은 오랜 정치적 동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측근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서로 다른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을 때도 가끔 만나 정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기본적인 정치 철학과 노선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해왔을 정도였다. 문 실장이 청와대 입성 직전까지 연구 모임으로 운영하던 '팍스 코리아나 21'조찬 포럼에 강연자로 가장 많이 등장했던 정치인이 노 대통령이기도 했다.
이런 정황에 미뤄 문 실장은 노 대통령이 내색은 하지 않으면서도 평소 눈 여겨 보아둔 경우에 해당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어느날 느닷없이 불러 대선 기획단장을 맡겼고 이번에 비서실장으로 발탁할 때도 예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과 문 실장은 1991년 신민―민주 통합으로 생긴 통합민주당 시절 각각 대변인과 이기택(李基澤) 총재 비서실장으로 처음 만났다.
문 실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밑에서 정치를 배웠고, 정권교체 이후 1998년에 첫 청와대 정무수석에 발탁됐으나 3개월 만에 도중하차했다. 한나라당내 상도동계와 연대하는 '민주 대연합론'을 주장했다가 대구·경북(TK) 세력과의 지역연합을 추진한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의 속성과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편이다.
"제갈공명도 있는데 …"라며 본인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지만 그에게 '겉은 장비, 속은 조조'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외모는 투박하지만 정국을 읽는 예리한 눈과 논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소신 때문에 권부에서 밀려난 경험을 맛본 그였지만 '노 대통령에게 아쉬운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아주 잘 하고 있다"는 말만을 되풀이 했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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