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서울대 법대 15동 528호. 연구실 서가의 책과 논문들을 싸는 P(47·여) 교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비록 계약직이지만 2000년부터 법대 첫 여교수(두뇌한국21 사업관련 계약직 조교수 및 법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해 온 P교수가 이날 짐을 싼 것은 3일부터 K대로 옮겨가기로 했기 때문.그간 정식 여교수가 없어 '금녀(禁女)지대'로 알려진 서울대 법대가 지난해 10월 이번 학기에 여교수를 채용하겠다고 밝힌 후 과연 여교수 1호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이목이 집중돼왔다. 하지만 지난달 말 결정된 법대 신규임용교수 명단에는 상법과 국제사법분야 남자 교수 2명밖에 없었다. P교수는 지난 학기 채용심사에서 1차부터 탈락하자 법대의 '남성위주문화'를 절감하고 결국 다른 대학을 택한 것이다.
이화여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한 P교수는 헌법학의 권위자였던 권영성(權寧星)박사의 수제자. 국내 헌법학전공 여성박사 1호이기도 한 그의 '법학개론' 강의는 수강생이 200명을 넘을 정도로 인기 과목이었다. P교수의 전직소식에 학생들은 '탁월한 P교수를 왜 안 뽑는 거냐' 는 화장실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한 법대 대학원생은 "수도권 대학에선 헌법, 민법, 형법 등 법학 중 메이저 분야에서 여교수가 강의를 맡는 데 대해 냉소적인 분위기가 있다"며 "실력있는 여성 지원자들이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것은 예견됐던 일"이라고 촌평했다. 지난해 대자보와 성명서를 통해 여교수 채용을 요구해 온 법대 학생회는 3일 교수들과 면담을 요청하고 교수채용 과정의 공개를 요구할 계획이다.
법대가 최근 발표한 올 2학기 법여성학 전임교수 채용 공고도 교육부가 국·공립대를 대상으로 여교수 채용 현황을 조사할 것이라는 소문에 부랴부랴 서둘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미현(21·여) 법대 부학생회장은 "법여성학 강좌 개설이 곧바로 여교수 채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며 "여성에 대해 폐쇄적인 법학계의 풍토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은형기자 voi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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