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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둘 그리고 하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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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둘 그리고 하나" 행복론

입력
2003.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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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북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한 남자가 남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빈 들판에서 둘이 만났다.남자가 물었다."어디에서 오니?"

여자가 말했다."남쪽에서 오는 길이야. 너는 어디에서 오니?"

"북쪽에서 오는 길이야. 혼자 오니?""그래""그럼 우리 결혼하자.""그래 내가 네 아내가 될게."

둘은 불을 피우고 함께 잤다. 이것은 이제까지 없던 처음 일이다. 해가 뜨면 둘은 둘이 되어 사냥도 하고 음식도 만들었다. 둘은 각기 완전했다. 그러나 서로 상대방의 한 쪽이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둘은 하나가 되었다. 신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지 않았다. 사람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낮에는 둘이고 밤에는 하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문칸족의 창조신화에서

이 신화를 처음 읽었을 때 참 산뜻했습니다. 태초에 신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남자로부터 여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여자가 남자를 유혹했다는 이야기,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었는데 갈라져 제 짝을 찾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야기, 여자가 된 짐승과 신의 아들이 결혼했다는 이야기, 양성구유(兩性具有)의 상징 등에 익숙해 있는 저에게 이것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낮에는 둘, 밤에는 하나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둘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둘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묘사가 참 좋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친구들 모임에서 했습니다. 반응이 제각기 달랐습니다.

"야, 그것 백인들이 원주민들에게 일부일처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기 위해 꾸며서 한 이야기 아냐?" 그래도 이 반응은 제법 점잖고 현학적입니다. 전혀 다른 친구도 있었습니다."역시 신화는 신화군. 요즘은 어떤지 아니? '낮에는 홀로, 밤에는 둘'이 현실이야. 남자도 여자도 끝내 혼자이지!" 이것은 심각한 자조(自嘲)입니다.

이 말을 듣던 다른 친구가 나섰습니다. "웃기고 있네.(저는 이 표현만 들으면 속이 메스꺼워집니다. 그 생리적 반응에서 벗어나려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너 나를 왜 실소하게 하니?'라고 하는 이 말의 의미가 왜 구토를 일으키는지 언제든 단단히 진찰을 받아볼 작정입니다.) 저렇게 세상을 모르니까 사는 꼴이 저 모양이지. 낮에 하나되는 하나, 밤에 하나되는 하나가 따로 있는 게 오늘의 모럴이야!"

농담들이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신화가 말하는 그대로 '낮에는 둘, 밤에는 하나'를 글자 그대로 사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좀 쓸쓸했습니다. 왜 그런지 그러한 농담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아파 보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지탱해왔던 준거가 속절없이 유실되는 현실을 살아가는 무력한 분노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신화를 마저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두 남녀는 살아가면서 새도, 짐승도, 도마뱀도 새끼를 낳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한테 말했다."내가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 테니 네가 키워주겠니?""그래, 그럴게. 하지만 먼저 네가 만든 그 작은 진흙 사람을 내 뱃속에 넣어줘야 해." 여자가 기꺼이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둘은 셋이 되었고, 하나는 둘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이것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머리를 만들어야지."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숲에 들어가 풀을 베어다 머리에 심었다. 여자는 정성껏 그 풀을 빗질하면서 잘 자라게 하였다. 그 아이가 젊은이가 되자 둘이 된 하나와 셋이 된 둘은 함께 사냥을 나갔다.

"행복하지 않니?"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정 진 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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