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금실 법무장관'개혁성향 여성변호사의 법무장관 취임.'
검찰 수뇌부가 사법시험 기수로는 많게는 11회, 적게는 5회 이상 아래인 신임 강금실(康錦實·사시 23회) 법무 장관에게 고개를 숙였다.
취임 표정
27일 오후 5시 법무부 2층 대회의실에서 거행된 강 장관의 취임식은 앞으로 휘몰아쳐 올 검찰개혁의 태풍이 예사롭지 않음을 가늠케한 현장이었다. 취임식에 앞서 강 장관과 상견례를 가진 김각영(金珏泳) 총장이하 검찰 간부들의 표정에서는 하나같이 긴장과 어색함, 착잡함이 복합적으로 배어났다. 이어 열린 취임식에서 강 장관은 원고도 없이 검찰개혁에 대한 소신을 낮지만 거침없는 목소리로 설파했다. 강 장관은 "저를 임명한 이유는 검찰개혁이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법무부의 문민화를 이룩하자는 의미"라며 "문민화는 수사권을 총장 이하 검사에게 귀속시킨다는 선언"이라고 정의했다.
임명과정에서의 반발기류를 의식한 발언도 있었다. 강 장관은 "저의 임명이 파격인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운을 뗀 뒤 "선뜻 수용하기 어려웠겠지만 제가 잘해야 검찰이 사는 만큼 지금까지의 생각을 버리고 헌신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검찰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고 지적하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회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취임식후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전통의식'도 생략됐다. 취임식이 끝난 후 한 참석자는 "냉기가 흐르네"라는 한마디로 소감을 대신했다.
살아온 이야기
경기여고 수석졸업, 서울지역 첫 여성 형사단독판사, 첫 여성 법무법인 대표, 첫 여성 민변 부회장 등 강 장관의 이력은 화려 그 자체지만 그 이면에는 예사롭지 않은 굴곡이 깔려있다.
서울대 법대 75학번인 강 장관은 대학시절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운동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회변혁에 대한 잠재된 욕구는 대학졸업 후 본격화한다. 운동권 출신의 김태경씨와 현직 판사 신분이던 1984년 결혼한 것. 부산지법 판사 때인 88년에는 출판사 '이론과 실천'을 운영하던 남편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 출간한 혐의로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94년 '사법파동' 때는 소장판사들의 '사법개혁 건의서'를 김덕주(金德柱) 대법원장에게 전달하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96년 서울고법 판사를 끝으로 변호사로 개업한 직후 민변에 가입한 강 장관은 99년 9월 민혁당 사건 변호를 맡는 등 본격적인 인권변호사로서의 행보를 내딛었다. 그는 2000년 초 벤처기업 컨설팅 전문 로펌인 법무법인 지평을 설립해 2년 만에 변호사 60여명을 거느린 중견 로펌으로 키워내는 사업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강금실 신임 장관이 법무부와 검찰의 독립 및 견제를 강조하자 일선 검사들 사이에선 불만과 기대가 교차했다.
우선 불만은 "'장관의 기존 권한 보유'와 '검찰 독립'은 모순아니냐"는 것이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검찰 독립은 한마디로 인사권의 독립"이라며 "인사권을 그대로 보유한 채 검찰 수사권을 보장하겠다는 발언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다른 검사도 "검찰 수사에 대한 정치권의 부당한 개입이 검찰 수사지휘권을 가진 장관을 통해 이뤄졌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고 우려했다. 조직 개편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도 지적됐다.
그러나 소장 검사들을 중심으로 기대 섞인 반응도 나왔다. 한 검사는 "어차피 단기간내에 법무부와 검찰의 완전분리는 쉽지 않고, 시급한 사안도 아니다"며 "개방적인 검찰 인사위원회의 활성화와 법무행정 분야의 강화 등 눈여겨 볼만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 김두관 행자부 장관
시골 이장이 행정자치부의 수장이 됐다. 김두관(金斗官·44) 행정자치부 장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뒤늦게 사회현실에 눈 뜨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 파란의 삶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닮은 꼴이다.
1959년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등록금이 없어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군에서 제대한 85년, 복학을 하지 않고 서울서 대학 다니던 대학생 동생과 시국 토론을 하다 사회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때부터 낮에는 월간지 판촉사원으로, 밤에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간사로 사회운동을 했다.
"지방에서 사회변혁의 뿌리가 되겠다"며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 그는 남해농민회를 조직하고 남해신문을 발간한 뒤 이장을 맡으면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그가 유명인이 된 것은 95년. 민자당 후보의 압승이 예상되던 지방선거에서 전국 최연소 군수에 당선된 것. 취임 후에는 기자실 폐쇄 등으로 전국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군수에 재선된 그는 지난해 6·13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도지사 선거에 나서 한나라당 김혁규(金爀珪) 지사와 맞붙는다. 비록 16.9%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지만 선거 과정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를 향해 "YS와 손을 끊으라"고 직언해 또 한번 뚝심을 내보였다. 행자부 장관으로 두 번째 기적을 일군 그는 "국장급은 형님처럼 모시고, 어린 직원은 후배처럼 대하면서 팀워크를 살려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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