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이야 말로 우리사회의 낡은 틀을 깨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정치개혁이 가장 시급한 국정과제 임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고, 정치인 스스로도 정치개혁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난해 12월 대선이 끝났을 때, 여야는 경쟁적으로 정치를 개혁하겠다고 앞장서 다짐했다. 선거에 나타난 민심이 정치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작심 3일' 이었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민의를 수렴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정치개혁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았다가는 다음 선거에서 떨어질 것 이라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중앙당을 아예 없애거나 슬림화해 원내정당화를 지향하고, 지구당을 폐지하며 대표 중심의 당지도체제를 바로잡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이 속한 당을 해체해 버리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자는 폭탄선언도 나왔다. 마치 고해성사에 나선 신자처럼 잘못을 뉘우치며 앞으로 잘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래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분위기 였다. 실현성 여부와 관계없이 백가쟁명식으로 터져나온 정치개혁의 요체는 스스로의 뼈를 깎겠다는 정당개혁이었다. 낙후된 정당정치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치가 소수의 과점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일류국가 반열에 진입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분명하게 형성됐으며, 그 첫걸음은 전근대적인 정당정치를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새 대통령 취임전에 정당개혁을 마무리 짓겠다고 했고, 한나라당도 이에 뒤질세라 개혁방안 마련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양당에 정치개혁특위가 설치됐고 회의가 잇달았다. 이 과정에서 지도부 교체 등 인적청산을 우선해야 하느냐, 아니면 정치시스템 쇄신 등 제도적 개선을 먼저 해야 하느냐를 놓고 논쟁이 계속됐다. 지도부는 반대파들이 개혁을 앞세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당의 헤게모니를 노리고 있다고 반발했고, 개혁을 주장하는 의원들은 지도부의 기득권 집착이 개혁을 가로 막고 있다고 비난했다. 근저에는 개혁이라는 명분보다는, 권력이라는 전리품을 차지 하기위한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새 대통령이 취임했고, 사회 각 분야가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는 지금 정당개혁이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당내 주도권싸움의 결과, 여야대표가 사임하고 대행체제가 가동되고 있을 뿐이다. 민주당은 대표와 최고위원제를 폐지하고, 지구당 위원장대신 운영위원장제를 도입한다는 개혁안을 마련했으나 비주류 등이 반대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당대표를 당원들의 직선에 의해 선출하고, 원내총무와 정책위원장에게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는 '직선대표·분권형 지도체제안'을 당론으로 확정했으나, 개혁성향의원들은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정당개혁이 이처럼 지지부진한 가장 큰 이유는 개혁의 대상이 개혁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개혁은 자기희생을 전제로 해야 하며, 필요하면 제살을 먼저 도려내야 한다. 손해를 감내하고서라도 개혁을 하겠다는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개혁의 결과가 당내의 세력판도는 물론, 내년 총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장애요인이 된다.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는 지도체제를 가지고 싸움을 계속하고, 지구당을 없애는 것이 내년 총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당쪽에서는 "정치개혁이 중요하냐, 아니면 내년 총선이 더 중요하냐"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이상적 개혁을 추구했다가는 한 표가 아쉬운 총선에서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는 현실론이다.
정당개혁의 부진은 정치개혁이 정치권의 자율에만 맡겼다가는 부지하세월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다. 자율로 안되면 타율이 필요해지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이 병 규 논설위원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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