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바웃 슈미트만일 당신과는 평생 만날 일이 없는 먼 땅의 누군가에게,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한마디로 입에 자물통을 채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면 무슨 말을 담을까.
"엔두구에게. 나는 네브라스카 오마하에 살고 있는 너의 양부 워렌 슈미트야. 66세. 얼마 전 우드먼 보험사를 정년 퇴임했지." 이렇게 정상적으로 시작한 편지는 슈미트가 짧은 한숨을 한 번 쉰 후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된다. "그깟 컴퓨터를 모른다는 이유로 새파란 놈에게 밀려나고 말았지. 마누라? 먹는 데 집착하고, 말 끊기가 취미인 데다 냄새는 왜 그리 나는지. 게다가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사 모으고. 더 열 받는 건 변기 커버에 오줌이 튄다며 앉아서 소변을 보라고 호통치는 거야…."
'어바웃 슈미트'(About Schdmit)의 주인공은 고집불통에 주변머리 없는 노인네다. 정년퇴임 후 무료하게 TV를 보다가 "하루 77센트면 불쌍한 어린이를 배부르게 먹일 수 있다"는 캠페인 구호를 본 슈미트(잭 니컬슨)는 자신의 후원을 받게 된 탄자니아의 6세 꼬마 아이 엔두구에게 편지를 쓴다. "마누라가 죽었으니 내가 9년 내에 죽을 확률이 73%란다" 라며.
침묵이 휴식이 아니라 일상이 될 때, 침묵은 고문이다. 슈미트에게 엔두구와의 편지는 지나온 인생을 반추하는 거울이자,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창구다. 청소를 하던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그는 엔두구에게 편지 쓰는 일에 골몰한다. 그러나 편지만으로는 이제 속을 다스릴 수가 없다.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그는 아내가 노후 대비용으로 사둔 캠핑카를 몰고 덴버에 사는 딸 지니(호프 데이비스)를 찾아 나선다. 홈쇼핑사에 근무하는 딸이 물침대를 파는 껄렁한 놈팽이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여행은 곤혹스럽다. 야영지에서 만난 남의 부인에게 입을 맞추다가 망신을 당했고, 딸은 "결혼하지 말라"는 말에 삐쳐 아버지에게 대놓고 반항하고, 사윗감은 장인에게도 사기칠 궁리만 한다. 안사돈(캐시 베이츠)은 "목욕을 같이하자"며 대놓고 유혹하고…. 딸은 결국 결혼했고, 슈미트의 여행은 즐겁지 못했다.
잔잔하게 코믹하고, 씁쓸하게 감미롭다. 잭 니컬슨 외의 다른 배우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연기는 안성맞춤이다. 이미 3개의 트로피를 가진 그를 아카데미는 또 주연상 후보에 올렸다. 12번 째인데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 감독은 오마하 출신의 신예 알렉산더 페인. 3월7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 갱스 오브 뉴욕
설령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두 가지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뉴욕의 오늘뿐만 아니라, 태생에도 집요한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가 그려내는 폭력은 그 어떤 영화보다 강도가 센 동시에 유혹적이다.
자고 나면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뉴욕 항에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1840년대의 뉴욕 이야기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에서 마틴 스콜세지는 에너지가 넘쳐 어쩔 줄 모르는 청년기의 감독 같다. 그는 너무 생생해 잔인하다는 느낌조차 떠오르지 않는 액션을 통해 160년 전의 뉴욕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준다.
뉴욕의 슬럼가이며 다양한 인종과 이민자가 들끓고 매춘과 협잡, 살인이 난무하는 파이브 포인츠. 아일랜드 출신으로 구성된 데드 레빗파를 이끄는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은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원주민파를 이끄는 인종주의자 '도살자' 빌(다니엘 데이 루이스)이 발론을 참혹하게 살해한다. 헐떡거리는 발론의 심장에 칼을 꽂는 빌의 모습을 생생히 지켜본 발론의 아들 암스테르담. 16년후 소년원에서 나온 그는 복수를 꿈꾼다. 빌의 수하에 들어간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자신만만한 태도와 주먹으로 인정을 받고, 마침내 빌의 피살 위기를 막아내며 신임을 얻는다. 빌은 자신의 여자인 소매치기 제니(카메론 디아즈)와 암스테르담의 연애까지 묵인할 정도로 여유와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인물.
영화는 암스테르담의 복수극과 파이브 포인츠에서 일어난 징병폭동(1863년 남북전쟁 당시 돈을 낸 사람을 징병에서 제외시켜 준 징병법에 반대해 일어난 사건)이 맞물리면서 아일랜드 이민자의 분노가 어떻게 폭발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을 죽이려는 암스테르담을 서서히 심리적으로 옥죄는 빌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매력적이다. 격투에서 제압한 후 뻗어 있는 상대방을 끝장내기 위해 공중으로 칼을 던져 심장에 꽂는 대목이나, 자신을 배신한 제니에게 장난처럼 위협을 가하는 장면 등 냉혈한 같은 표정과 말투는 지독한 잔인함과 냉혹이 카리스마의 덕목임을 입증한다. 연기자보다는 스타라는 말이 어울리는 카메론 디아즈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도 수준급.
그러나 이 모든 배우들의 '진짜 연기'를 뽑아낸 사람은 역시 마틴 스콜세지다. 액션과 살인의 생생한 묘사는 폭력영화를 보며 분비할 수 있는 아드레날린의 최대치를 겨냥한 듯하다. 3시간 넘는 러닝 타임을 2시간 40분으로 줄인 것은 잘못이다. 복수에 나선 암스테르담이 아일랜드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정치운동을 하는, 자칫 두 개의 영화를 합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케일, 에너지, 카리스마 등 남성적 영화의 매력을 한껏 내 뿜는 영화. 18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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