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6일 첫 수석 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직접 사정(司正)의 속도조절 필요성을 언급함으로써 이른바 정권 초기에 있어왔던 '소나기성 사정'에 제동을 걸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첫 현안으로 노 대통령이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만큼 검찰 등 사정기관의 최근 움직임이 새 정부의 안정적 출범과 향후 국정의 원만한 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반영한다.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이 원칙론을 제기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이 최태원(崔泰源) SK(주)회장 구속수감, 손길승(孫吉丞) SK그룹회장 소환설에 이은 한화그룹에 대한 검찰수사 재개, 금융감독원의 동부그룹 특감, 민주당 이윤수(李允洙) 의원 수뢰혐의 수사 등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정 활동을 겨냥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관심은 검찰 등 사정기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굳이 사정의 속도조절을 언급한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에 쏠리고 있다.
문재인(文在寅) 민정수석의 설명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발언은 '최근 사정기관들의 움직임이 새 정부의 의도에 따른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문 수석은 그러나 "사정활동은 꾸준하고 차분하게 정치적 의도 없이 진행돼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역으로 현재의 사정 활동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됐을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은 사정기관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부의 방향성에 부응하기 위해 이른바 '알아서 행동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적 의도라고 보는 데서 비롯된다. 청와대의 또다른 고위 관계자가 "검찰 등 사정기관이 처음에는 너도나도 한상씩 차려 올리다가 나중에 흐지부지하고 마는 것도 길게 보면 '새 정권 길들이기'일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노 대통령의 언급에는 정치적 이유 못지않게 경제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행여 투자를 위축시키고 경제회복을 더디게 하는 쪽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검찰수사가 다른 재벌기업에 까지 확산될 수도 있다는 시중의 우려에 청와대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북한 핵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있고 한미 관계 등 국제적인 여건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경제가 위축될 경우 새 정부의 국정 운영에 큰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속도조절을 직접 언급했지만 이 언급에 따른 파장에 대해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 정부는 사정기관의 활동에 대해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도 "사정기관들이 '소나기 사정'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 이 같은 속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새 정부가 사정기관의 독립성과 국정 운영의 안정성 사이에서 어려운 행보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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