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나의 전부다. 제약회사에서 기름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만주 시절의 유복했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독일제 축음기 때문이었다. 보통 축음기는 태엽 1개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자주 멈춰 섰으나 우리 집에 있던 그 독일제는 태엽 4개짜리여서 한 곡 정도는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진천에 있을 때는 미군들이 버린 탄약 박스에서 떼낸 널빤지에 전화선을 엮어 가야금을 만들기도 했다. 대나무를 잘라 기러기 발처럼 줄을 받쳤는데, 사실 무늬만 가야금이었다. 그러나 그 가야금으로 어머니의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민요나 동요를 연주했었다. 어머니는 하모니카를 잘 불었다. 하모니카도 흔한 버터플라이가 아니고 값비싼 톰보였다. 하모니카를 불면서 행복해 하던 어머니의 그 때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새벽 4∼5시에 일어나야 했던 제약회사에서 유일한 낙은 어머니의 톰보 하모니카를 부는 일이었다. 뒷동산에 올라가 하모니카를 입에 물면 행복했던 지난 날이 절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자꾸 하니 싫증이 났다.
그래서 꼬박 3년간 일해 번 돈을 악기 하나를 사는데 모두 털어넣었다. 미군 물품을 파는 영등포의 한 잡화점안에 있던 근사한 바이올린이었다. 한강 철교가 끊겨 있던 상태라 물건을 떼러 노량진에서 영등포 쪽으로 자주 심부름을 갔는데, 그 때 눈여겨 봐두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왜 바이올린이었을까?
그 곳에는 바이올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게 산 바이올린이었지만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외국어 교본을 들여다 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1년 뒤 기타로 바꿨다. 기타는 치면, 소리가 그런대로 났기 때문이었다.
기타 교본은 악기점에 있던 코드집과 미군 부대에서 흘러 나온 'Song Folio'라는 노래 책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막 국내에 상륙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를 배우고 싶어 회사측에 "급한 일이 있다"고 속이고 일요일 하루를 쉬었다. 그날 프레슬리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던 아카데미 극장에 가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포스터만 봤다. 기타를 메고 노래 부르는 프레슬리의 모습이 너무나 멋졌다. 나는 집에서 그 흉내를 내고 또 냈다. 팍팍한 생활에서 그런 시간을 내려니 먹고 자는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새벽 1∼2시에 자서 늦어도 5시면 일어났다. 낮에 꾸벅꾸벅 졸더라도 밤이면 꼭 기타를 잡았다.
야간 중학교를 마치고 후암동에 있던 서라벌고 야간부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외근으로 돌았다. 도매상에 약품을 대주고 수금을 해오는 일이었는데, 영등포 미아리 청량리 등 서울 시내에 자전거로 안 돌아다닌 데가 없다. 하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청소한 뒤 사장 자동차의 엔진을 미리 걸어 놓는 것으로 시작됐다. 겨울이면 꽁꽁 언 엔진을 녹이기 위해 깡통에다 숯과 나무를 쑤셔 넣고 불을 붙여 자동차 밑에 갖다 대야 했다.
음악이라곤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나는 음악 연습을 했다. 애써 외운 코드를 잊지 않도록 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대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기어코 나는 그 곳을 뛰쳐 나왔다. 5년간 쳇바퀴 돌듯 똑 같은 일을 반복해 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 달에 딱 한 번 쉬는 어느 일요일, 나는 회사를 나와 이전부터 눈여겨 봐 두었던 곳을 찾아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 최초의 음악 감상실이었다. 라이브 무대로 운영되던 그 곳은 별천지였다.
바이올린 주자 김광수가 이끄는 캄보 밴드는 멋진 탱고와 라틴 음악을, 송민영 밴드는 글렌 밀러와 베니 굿맨식의 멋들어진 스탠더드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밖의 몇몇 카바레 밴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후 재즈의 멋에 빠진 나는 클라리넷 주자 엄토미가 운영하던 '은성 살롱'에 가 라이브 재즈에 취하곤 했다. 거기는 원래 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었지만 잘 알고 있던 선배를 졸라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입장료도 선배 몫이었다.
너무나도 거기에 합류하고 싶었던 내가 작은 사고를 친 것은 어느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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