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대 부문 개혁 평가외환위기로 '경제파탄' 상태에서 시작한 DJ정부는 금융·기업·공공·노동 등 4개 분야로 나눠 경제 전반에 대한 구조개혁을 진행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4대부문의 개혁은 양이나 질적인 측면 모두 '절반의 성공'에 머무르고 있다.
양적인 측면에서 금융·기업부문 구조조정은 합격점을 받을 수 있으나, 공공·노동부문 개혁은 시늉에 그쳤다. 1997년말 2,068개였던 우리나라 금융기관은 5년간의 구조조정으로 2002년말 1,510개로 감소했고, 99년 전체 여신의 14.9%에 달했던 부실채권 비중도 4.2%로 줄어들었다. 기업부문에서도 대우그룹 등을 포함해 5년간 250여개 기업이 정리됐다. 또 97년말 396.3%였던 부채비율도 지난해에는 135.6%로 감소했으며, 수익률도 97년 마이너스 0.6%에서 지난해에는 7.3%로 개선됐다.
그러나 공공부문 개혁은 통계상 14만1,000여명의 인력이 감축됐음에도 불구, 구조조정이 하위직에 집중됐으며 퇴직 직원에 대한 과다한 명예퇴직금 등으로 당초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 노사정 위원회를 통한 노동부문 개혁도 주5일제 근무의 표류가 말해 주듯이 합격점 이하의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금융·기업 부문의 구조조정 역시 그 과정에서 160조원 이상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으며, '공적자금은 80%이상 환수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부의 당초 약속과 달리 국민이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은 구조개혁이 정부의 효율적 정책집행보다는 국민의 희생 위에 이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 벤처 정책
'벤처기업 육성'은 코스닥 지수가 그나마 100선을 넘어섰던 2000년 중반까지만 해도 DJ정부의 최대 치적 중 하나였다. 그러나 DJ정부 벤처정책은 사상 유례없는 '머니게임'으로 번지면서 결국 60조원에 달하는 돈을 허공으로 날린 뒤 막을 내리게 됐다.
DJ정부는 총수의 황제경영과 문어발 확장을 일삼은 재벌 때문에 외환위기가 촉발됐다고 판단했고, 양심적 전문 경영인이 특정 분야에 경쟁력을 집중하는 벤처를 대안으로 선택했다. 1998년부터 대대적인 벤처육성 정책이 추진됐다. 벤처기업에 지정만 되면 각종 세금을 감면 받았고, 코스닥에도 등록돼 대박을 터뜨리는 사례가 잇따랐다. 성공신화에 자극받은 벤처기업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1998년 2,000여개이던 벤처기업이 지난해말에는 1만1,300개가 됐다. 2000년 3월까지 벤처는 한국 경제의 희망이었다. 1998년말 7조8,000억원에 머물렀던 코스닥 시가총액이 1999년말에는 98조7,000억원이 됐다. 하지만 투기열풍이 가라앉고 정현준, 이용호, 진승현 등 벤처 기업인의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면서 시가총액이 2002년말에는 37조원대로 주저앉았다. 60조원이 벤처거품 속에 사라진 것이다.
■ 정치·사회 주요사건
국민의 정부 5년은 '풍(風)'으로 시작해 '게이트' 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치, 사회적인 사건이 많았다. 시작은 97년 대선 기간 야당의 북한 접촉을 문제 삼은 북풍 사건이었다. 대선 직전 한나라당 정재문(鄭在文) 의원이 북측 인사와 만난 뒤 안기부가 오익제 편지사건 등을 조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한나라당이 북측에 판문점 총격을 요청했다는 총풍 사건, 한나라당이 국세청을 통해 대기업 등으로부터 대선 자금을 모금한 세풍 사건, 안기부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거액의 선거자금을 제공했다는 안풍(安風) 사건 등이 줄을 이었다. 그 와중에 권영해(權寧海) 전 안기부장의 자해 소동과 구속,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전 대선후보의 최측근이었던 서상목(徐相穆) 의원의 의원직 사퇴가 이어졌다.
신동아그룹 최순영(崔淳永) 전 회장의 부인 이형자(李馨子) 씨가 남편의 구명 로비를 위해 장관, 검찰총장 부인에게 호피무늬 반코트 등을 선물했다는 옷로비 사건은 여권에 큰 타격을 줬다. 이 사건은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과 함께 처음으로 특별검사 수사대상이 되면서 국민의 정부 도덕성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2000년 여름부터는 게이트 시리즈가 시작돼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과 정현준 게이트를 거쳐 이용호 게이트와 진승현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로 줄을 이었다. 이들 사건은 당시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 신승남(愼承男) 검찰총장 신광옥(辛光玉) 법무차관 이수동(李守東) 아태재단 이사 권노갑(權魯甲) 민주당 전 고문 김은성(金銀星) 국정원 2차장 등 권력 최고 실세들을 구속시키거나 낙마시켰다. 특히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업(弘業) 씨와 3남 홍걸(弘傑) 씨까지 비리에 연루돼 구속됨으로써 DJ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 편중인사 시비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5년간 끊임없이 호남 편중 인사 시비에 시달렸다. 호남 출신 대통령 밑에서 호남 인맥이 각종 요직을 차지한 게 근본 원인이었다. DJ 정부는 "이전 정부에서의 영남 편중 인사에 따른 지역간 불평등 불균형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야당은 이를 '특정지역의 요직 독점'으로 몰아세웠고 영남권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이 가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중앙인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01년 말 기준으로 정부부처 120개 핵심요직의 출신 지역 분포를 보면 호남이 29%를 차지했다. 5공 13.9%, 6공 10.0%, 문민정부 11.0%보다 두 배 이상 급상승한 수치이다. 중앙부처 공무원 중 3급에서 2급, 2급에서 1급으로 승진하는 데 걸린 기간도 DJ 정부에선 호남 출신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빨랐다고 공무원들은 입을 모은다. 또 한국전력 등 18개 주요공기업 사장 중 호남 출신이 44.2%로 절반에 가까웠다.
한국 행정연구원이 분석한 '역대 장관 재임 기간 및 배경' 자료를 보면 국민의 정부 들어 2002년 2월까지 장관 재직자는 호남과 영남이 같은 23명이었다.
그러나 호남 출신은 재정경제부 법무부 국방부 등 핵심 요직에 집중 포진했다. 특히 검·경 국세청 국정원 등 핵심 권력기관의 요직에는 어김없이 호남 인사들이 배치돼 다른 지역 출신들의 불만과 소외감을 야기했다는 평이다. 반면 일부에서는 "DJ 집권을 계기로 영남 위주의 권력 인맥에 변화가 오고 그 효과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것은 길게 봐서 긍정적"이라는 평도 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IMF탈출 최대 치적 꼽혀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벗어난 것은 국민의 정부 최대 공적으로 꼽힌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 5년간 경제지표는 '합격점'을 주기에 충분하다.
집권 직전인 1997년 말 외환보유액은 204억달러, 해외예치 외화자산을 제외한 가용 외환보유액은 40억달러에 불과해 국가부도 직전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 국제수지 흑자기조 전환 등으로 2001년 1,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15일 현재 1,234억 달러로 일본, 중국, 대만에 이어 세계 4위 외환보유국으로 올라섰다. IMF 지원자금 195억달러도 당초 계획보다 3년 가량 앞당긴 2001년 8월 전액 상환했다. 성장률, 물가, 국제수지 역시 양호한 수준을 유지했다. 성장률은 IMF 체제 첫해인 98년 마이너스 6.7%에서 99년 10.9%, 2000년 9.3%의 높은 성장을 기록했다. 세계 경기가 침체에 빠진 2001년과 지난해에도 각각 3%와 6%의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빈부격차 확대, 노동과 공공부문의 미진한 개혁, 국가와 가계부채의 급증 등은 'DJ노믹스'의 부정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최근 북핵 사태, 이라크전쟁 가능성에 따른 유가 급등, 세계경기 및 내수 침체 등으로 국가신용등급이 내려갈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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