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초 이스라엘 예루살렘. 얼마 전 발생한 이스라엘 여객기를 향한 로켓포 테러 시도 때문에 경계가 더욱 엄중해져 도시 전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루살렘 시내 이스라엘예술과학고(IASA)의 철문 안쪽에도 기관단총을 든 경비원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하지만 학교 건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학생들은 로비 바닥에 엎드려 자유롭게 각종 영자지와 이스라엘 신문을 읽고 있었고,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과학과 예술의 조화
이스라엘 예술과학고의 가장 큰 특징은 과학과 예술의 조화를 통해 상위 1% 학생의 영재성을 최대한 끌어낸다는 점이다. 매년 75명의 학생을 선발하면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75%이고 나머지 학생들은 음악과 시각예술을 전공한다. 이스라엘 교육이 중점을 둔 '학문과 학문의 접합'을 꾀하는 학제간 교육의 대표주자다.
예술과학고 2층 물리실험실. 음악, 물리, 생물학을 전공하는 10학년 학생 예닌, 인발, 샤칼 세 명은 과제 수행을 위해 한창 토론 중이었다. "전기 센서를 문에 달아 문이 열리는 정도에 따라 음악 소리가 다르게 나오는 것을 녹음하자."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를 녹음해 음의 고저를 분석하면 물리적인 그래프로 어떻게 표현될까?"
학생 스스로 계획하고 교사나 외부 교수의 보조 도움을 받아 과제를 수행하는 길더 프로젝트에 몰두하던 세 학생은 "음악하는 친구는 물리 법칙의 원리를, 과학 전공하는 친구는 모든 주변 사물과 현상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방식을 알게 된 기회"라고 입을 모았다. 물리 담당 크라코베 제에브 교사는 "연구 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알아야 하는지 정해주지 않고 윤곽만 잡아준 뒤 지켜본다"며 "음악, 미술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이 결국 과학적인 사고 능력 함양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철학수업 시간 역시 학제간 교육의 대표적 사례다. 3층 작은 교실 칠판에 덩그러니 쓰여있는 'Game Theory'가 이날 수업을 받는 세 명의 과학 전공 3학년 학생의 연구과제다. 한 학생은 "철학은 사고의 깊이를, 과학은 체계를 강조하는데 이 두 가지를 함께 배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자율과 창의성
이 학교 영재교육 방식의 또 다른 특색은 자유로움이다. 학생 지도 담당 베른트 쉐링 교사가 전하는 에피소드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한 학생이 1993년 예술과학고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물리 담당 교사에게 "자기공명장치를 이용해 암세포를 죽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사는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실험실 열쇠를 주며 연구과제를 수행토록 했다. 결국 1년 뒤 이 학생은 "실현 불가능한 가정이었다"며 포기한 뒤 열쇠를 돌려줬다. 하지만 그 학생은 월반을 거듭해 24세인 2003년 현재 헤브루대 물리학과 대학원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꿈꾸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지만 수업을 받지 않고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교사들 역시 학생들의 수업 참여를 강요하지 않았다. 10학년 디놀 다말 학생은 '세포 조직 메커니즘'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생물 수업 대신 도서관을 찾았다. 그는 "비디오 예술 작품 속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도형들의 움직임을 세포 조직 연구와 결합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로니 에레즈 교장은 "예술과 과학의 만남, 자율적인 분위기 속의 연구 프로젝트 수행은 이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뒤 단순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단언했다.
/예루살렘=정상원기자 ornot@hk.co.kr
■ 로니 에레즈 교장 인터뷰
"빨리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도달하게 될 목표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가느냐가 영재교육에서는 더 중요하죠. 창의성의 문제니까요."
이스라엘 예술과학고 로니 에레즈(49) 교장은 세계 영재학계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90년 개교한 예술과학고를 이끌면서 현대식 영재교육의 틀을 다진 까닭에 각국에서 열리는 영재학회에 늘 주요 연사로 초청된다.
"역사가 짧고 800여명의 졸업생들도 아직은 풋내기 과학자, 예술가에 불과하죠. 하지만 탈무드라는 전통적인 이스라엘 교육의 역사 덕분인지 세계 각국의 관심이 큽니다. 예술과 과학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를 접목해 교육하는 방식도 흥미롭죠."
3년제 고등학교인 이스라엘 예술과학고는 1학년 공통교육을 마친 뒤 2학년부터 수학, 물리 등 과학분야와 음악, 시각예술 등 예술분야로 특화한 교육을 받게 된다. 에레즈 교장은 "예술과 과학 두 분야를 같은 비중으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다"며 "서로 다른 분야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접근 방식을 만드는 게 최근 학문의 동향"이라고 설명했다.
로니 에레즈 교장은 지난해 9월 한국을 다녀가며 선물 받은 한글판 탈무드를 꺼내 들었다. "탈무드의 핵심은 대화를 통한 교육에 있습니다. 뛰어난 교사진과 학생들 사이의 끊임없는 교감, 학생들 스스로가 뛰어드는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영재교육에서는 중요하죠. 한국의 영재교육도 '대화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정상원기자
■기고 / 유대인의 "동기부여" 교육
상당수 한국인들은 유대인의 교육방식에 관심이 많다. 미국 인구의 0.02%에 지나지 않는 600만의 유대인들이 미국의 정치·경제·문화·예술·학계 등 다방면에서 큰 성공을 거둔 까닭이다. 특히 미국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과학·경제분야) 중 약 40%가 유대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떤 교육을 받기에 어려운 여건과 환경을 극복하고 세계적으로 특출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일까? 유대인 교육, 즉 탈무드 교육(유대인 교육을 탈무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주로 탈무드를 가르쳤기 때문이다)은 전통적으로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동기를 갖도록 특별히 노력했다.
중·근세 유대인 사회에는 입학식날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학교로 함께 가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다. 교사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성경(공부)은 나의 일이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꿀이 발린 접시를 보여 주고 그것을 먼저 읽은 후 아이가 읽도록 한다. 성경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꿀처럼 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다. 이 전통은 지금도 내려오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억지로 공부하도록 하기 보다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먼저 가르친다. 탈무드 교육은 학생들의 학습능률을 중시한다. 유대인 커뮤니티마다 학교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재력이 있거나 아이에게 특별한 능력이 발견될 경우 가정교사를 채용해 아이를 가르쳤다. 이른바 탈무드식 영재교육인 셈이다. 70년대부터 시작된 현대 이스라엘 영재교육에서도 이러한 방식이 활용되고 있는데 학교에서 학생들의 학습활동을 도와 주는 개인교습(tutorial) 제도가 그것이다.
유대인 영재교육의 또다른 특징은 학생들의 학습수준과 능력을 고려하며 가르친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등 기초적인 과목을 가르치고, 일정한 학습수준에 이른 뒤에만 탈무드를 가르친다. 이스라엘 학교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따라 학생들은 일정한 학습수준과 능력에 따라 과목을 배운다. 그러면서도 초등학교 2∼3학년부터 각 반의 상위 3% 안에 드는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영재교육을 받는다.
유대인 교육은 교육방법이나 교육문화적 측면에서 독특하다. 무엇보다 공부에 대한 동기를 중시하고 학생들의 학습수준과 능력에 맞게 가르친다. 또한 학교 교육의 틀 안에서 학생들이 충분히 자신들의 지적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다. 이 측면에서 유대인 교육은 학업성취능력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모형을 찾는 한국의 영재교육에 상당한 의미를 줄 수 있다.
/김 현 원 문화부 사무관
※ 김현원씨는 이스라엘 히브리대에서 3년 동안 이스라엘 사회와 교육을 공부하다 지난해 귀국, '한국교육 그러나 희망은 있다'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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