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이끌어 온 '국민의 정부'가 이제 소임을 마치고 시대와 역사의 계단을 내려온다. 퇴임을 목전에 둔 김 대통령이 최근 밝혔듯이 역사의 평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김 대통령은 1998년 초 IMF사태라는 초유의 경제적 파산 상태에서 정권을 넘겨 받았다. 김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경제 개혁의 강한 드라이브를 걸어 80%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재벌 및 노사 개혁을 포함한 4대 개혁은 김 대통령에게 98년 6·4 지방선거 압승, 국가신인도 향상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그러나 집권 2년째인 1999년 12월 '옷로비 사건'이라는 정권 최초의 권력형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정권의 도덕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주가 회복 등 경제 분야의 좋은 성적이 여전히 DJ의 버팀목이 돼 줬다. 2000년은 남북관계가 만개한 해였다. 김 대통령은 6월에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면서 햇볕정책을 경제 복구와 함께 국정의 2대 핵심 축으로 자리잡게 했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온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2000년 말부터 각종 게이트들이 터져 나오면서 DJ의 정국 장악력은 눈에 띠게 흔들렸고 2001년 2월 취임 3주년의 DJ 지지도는 40%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국민의 실망감은 2002년 두 아들 비리가 터지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정권 탄생의 기반이었던 DJP 공조가 국민의 정부 중반기인 2000년 9월 깨졌던 것도 DJ에겐 큰 부담이 됐다. 김 대통령은 남북관계 발전으로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았지만 집권 말기에 터져 나온 대북비밀지원 사건으로 퇴장 직전까지 국민에게 사과하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고태성기자 tsgo@hk.co.kr
■ 공동정부 실험
민주당과 자민련의 대선 공조는 국민의 정부 출범의 결정적 동력인 동시에 국정 시행착오와 불안을 부른 원죄(原罪)였다. 두 당은 서로 다른 정체성과 이해관계로 인해 공조가 지속된 3년 8개월간 분열과 대립을 되풀이했고 공조가 깨진 후 정권은 소수파로 전락, 급격한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김대중 대통령과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는 15대 대선 직전인 1997년 11월30일 후보단일화에 전격 합의, 대선 승리 후 각료를 반분하는 공동정부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시대 흐름에 전혀 맞지 않거나, 검증 안된 인사들이 내각에 들어가 국정혼선과 여론의 냉소를 자초 했다.
두 당은 김 대통령 취임 10개월 만에 내각제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결국 민주당은 2000년 1월 내각제를 당 강령에서 삭제, '정권출범 1년 후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자민련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대선 4수(修)'를 통해 집권한 김 대통령이 임기의 반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그대로 이행할 것으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16대 총선 후 민주당은 의원 4명을 자민련에 보내는 전무후무한 '의원 꿔주기'로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주는 등 관계 복원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2001년 9월 당시 임동원(林東源) 통일부 장관의 해임 건의안에 자민련이 찬성 표를 던짐으로써 마침내 파국을 맞았다.
갈등의 계기는 다양했으나, 근본 원인은 숙명적 정체성 차이에 있었다. 대북관 등 이념 성향에서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거리를 지닌 두 당의 연대는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는 지적이다. 내각제 개헌 백지화까지 양해했던 JP도 정권의 대북 정책 기조에는 끝내 동의할 수 없었다. DJ 역시 "공조는 복원할 수 있지만 남북관계는 물러서면 회복이 어렵다"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타협을 거부하고 정치적 피해를 감수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 대북정책
국민의 정부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이다. 하지만 북한은 동시에 김대중 대통령을 임기 말까지 괴롭힌 숙제였다.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을 통한 대북화해기조는 현 정부에 이어 차기 정권 5년으로 이어져 사실상 영속적인 국가목표로 자리잡게 됐다.
기실 분단 반세기의 벽은 지난 5년 동안 곳곳에서 허물어졌다. 출발은 물론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2차례 소떼 방북, 정부차원의 대북지원을 표방한 '베를린 선언' 등을 거쳐 성사된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이때 남북이 채택한 6·15 공동선언은 이후 남북관계를 유지시킨 버팀목 역할을 해냈다.
남북은 9차례의 장관급 회담을 포함해 정치 경제 적십자 등 각 분야에서 80차례에 가까운 당국간 공식 회담을 가졌다. 4만 명에 가까운 인적 왕래가 있었고, 끊어진 경의선 철도 연결이 목전에 다가왔다. 이 달에는 비무장지대(DMZ)를 관통하는 동해선 임시도로가 개통돼 육로를 통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남한의 교류·협력 강화에 조응하려는 듯 북한도 실용주의적 변화 조짐을 보였다. 북한은 '신사고'라는 의식전환 운동을 벌였는가 하면, 지난해 9월에는 남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대규모 응원단을 보내왔다. 또 지난해 7월 경제개선관리 조치를 취한 이후 신의주 금강산 개성을 잇따라 개방했다. 그러나 이 같은 화해무드는 서해교전 등 군사적 충돌,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압박 등에 쉴 새 없이 타격을 받았다. 2001년 8월에는 민간단체의 이른바 '만경대 사건'으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 낙마하기도 했다.
햇볕정책의 지속적 추진여부를 둘러싼 심각한 국론분열은 급기야 대북 비밀송금 파문으로 확대 재생산돼, 남북 신뢰관계의 기반인 정상회담과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도덕성까지 흔들어댔다. 아울러 지난해 10월 미국 특사단의 방북을 계기로 터져 나온 북한 핵 위기는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일거에 경색시켰고, 대북문제에 대한 한미간 인식차를 극명하게 노정했다.
"역사 속에서 평가할 것"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말처럼 DJ 정부의 대북정책은 많은 것을 잃고, 또한 많은 것을 얻게 한 중대한 선택이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 권력기관의 독립성
김대중 정부는 권력기관의 정치적 독립을 제도화하리라는 기대감 속에서 출범했다. 그러나 임기를 끝내는 지금 이 부문에 대한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다. 양대 권력기관인 검찰과 국정원이 정치권과 연계된 스캔들 때문에 쉴새 없이 흔들렸고 일부 수뇌부 인사는 사법 처리되는 수모까지 당했다.
검찰의 경우 총장이 법적으로 2년의 임기를 보장 받고 있지만 DJ 정부 5년 동안 검찰총장이 5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벌써 검찰의 수난을 상징하고 있다. 더구나 김태정(金泰政) 신승남(愼承男) 전 총장은 후배 검사에 의해 기소되는 치욕까지 겪었다. 김 전 총장은 총장 재직시 발생한 옷로비 사건으로 법무장관에 임명된 지 2주일 만에 해임돼 구속되기까지 했다. 신 전 총장은 정권 실세 이수동(李守東) 씨에게 수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돼 현재 1심에 계류중이다. 이들뿐 아니라 정권과 지역적 배경이 같은 호남 출신 검찰 수뇌부 중 상당수가 각종 게이트에 연루돼 조직에 오명을 남겼다. 옷로비 사건과 파업유도사건, 이용호 게이트 등 세 차례의 특별검사 도입은 검찰에 대한 국민 불신이 극점에 달해 있다는 반증이었다.
국정원은 정권 초기 정치 공작의 음습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과 훈령까지 바꿨지만 역시 DJ 집권 5년 내내 정치·사회적 논란의 표적이 되다 새 정부의 개혁 대상으로 점 찍히는 신세가 됐다. 이종찬(李鍾贊) 전 원장의 언론장악 문건 파문 연루, 도·감청 의혹, 대북 비밀 지원 사건 등이 대표적인 국정원 관련 문제 사안들. 김은성 전 2차장은 진승현게이트에 이름이 올라 사법처리됐다. 지난 대선 기간에는 국정원 직원들의 정치권 줄대기가 큰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기밀 사항들이 야당으로 흘러갔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간첩 잡는 게 주 임무'인 국정원의 정체성 위기를 문제 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임동원 전 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 특히 대북 비밀지원 사건에 깊숙이 개입해 보수 세력으로부터 "국정원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다"는 비난을 자초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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