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직 지음 현실문화연구 발행1만5,000원만화는 시대의 얼굴을 보여준다. 일제시대에도 그랬다. 일제의 언론탄압이 심해지면서 1930년대 신문 잡지에서 시사만화가 거의 사라진 대신 만문만화(漫文漫畵)라는 새로운 장르가 주류로 등장했다. '흐트러진 글과 그림'이란 뜻의 만문만화는 한 컷짜리 만화에 짧은 글이 붙은 형식인데 당시 경성의 도시 풍경을 주로 다뤘다.
국문학자 신명직(도쿄외국어대학 객원교수)씨가 쓴 '모던 보이, 경성을 거닐다'는 우리나라에서 만문만화를 처음 시작한 안석주(1901∼1949)가 남긴 만문만화를 통해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을 읽어낸 흥미로운 책이다. 식민통치가 이미 공고해진 가운데 현실은 누추했지만, 밀려드는 서구 자본주의와 근대의 세례를 받은 모던걸, 모던보이들은 근대 도시 경성을 누비며 청춘을 노래했다. 영화, '딴스', 유성기, 카페, 자동차 드라이브, 백화점 쇼핑, 창경원 밤벚꽃놀이, 문화주택(2층 양옥) 등이 그들이 즐기고 욕망한 것들의 목록에 들어 있었다. 미국 발 대공황과 이탈리아 파시즘, 독일 나치즘의 등장으로 어수선하던데다 서민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는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안석영은 이 일그러진 근대의 표정을 날카롭게 잡아내 그렸다.
거기서 드러나는 당시 사회상은 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가슴 아프다. 황금 시계와 보석 반지를 자랑하려고 전차 안에서 좌석이 텅 비었는데도 손잡이를 잡고 선 여자들의 굵은 팔뚝 행렬은 실소를 자아낸다. 프랑스 영화 '몽파리'에 등장한 이른바 벌거벗은 패션이 모던걸 사이에 대유행하자 '옛날 도포짜리'들은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이를 풍자한 만문을 보자. 당시 표기법을 그대로 옮긴 글이 낯설기도 하지만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녀성 프로파간다―시대』가 오면 모던 들의 옷들이 몹시 간략해 지겟다. 볼상에는 해괴망측하나 경제상 매우 리로울 것이니, 실 한 꾸레미와 인조견 한 필이면 삼대를 물릴 수도 잇겟슴으로 이것이 간리한 생활방식에 하나. 얼마 아니 잇스면 모던 들이 솔선하야 의복긴축 시위운동을 장대히 하게 되지 안흘가?" ('여성선전시대가 오면'―조선일보 1930.1.14)
요즘의 오렌지족을 연상시키는 모던걸 모던보이들의 연애 풍속 중 하나였던 자동차 드라이브를 다룬 작품은 더욱 신랄하다.
"요사히 보히는게 지랄밧게 업지만 자동차 『드라이브』가 대유행이다. 탕남탕녀가 발광하다 못해 남산으로 룡산으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러브씬―』을 연출하는 것은 제딴에는 흥겨웁겟지만 자동차 운전수의 『핸들』쥔 손이 엇지하야 부르 떨리는 것을 아렷는지."('이꼴저꼴 4'-조선일보 1933.2.19.)
그래봤자 어차피 식민지.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매혹되어 걷던 경성 뒷골목엔 실업자가 넘치고 고단한 삶에 찌든 서민의 한숨이 가득했다. 가난한 모던보이는 탄식한다. "머리는 경긔구(輕氣球)가치 놉흔 곳으로 뜨지만, 현실은 몸둥이를 땅으로 잡아꺼니 지식이 잇서도 오장육부의 스트라익에는 견딜 수가 업는 것이다. 모던걸의 시선과 마조칠 대, 제 주제를 살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얼골이 벌개지는 것도 인테리의 앙증스러운 순정이라 할가"('고물상 양복점'―조선일보 1933.10.20.)
댄스는 가정으로까지 번져, 돈이 없어 도배도 못 한 사람들이 "갑빗산 축음긔를 사다노코 비단양말을 햇트리면서" 춤을 추기도 했다. 안석주는 근대의 유행을 따라잡으려는 '가엽슨 발버둥'을 안쓰럽게 봤고, 경성에 온 미국 관광객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다니는 '눈꼴 틀리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가 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따지고 넘어가는 신여성 아내를 딱따구리에 비유하기도 하는 등 당시 사회상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의 발언을 만문만화에 담아냈다.
그의 눈길은 경성의 골목골목을 샅샅이 훑고 있다. 전차와 자동차, 백화점, 다방, 카페, 바 등 화려해 보이는 근대적 풍경과 나란히,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과 아둥바둥 하는 악다구니가 시궁창 사이로 흘러다니는 뒷골목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식민지 근대의 이중성과 모순을 직시하면서도 그런 조선의 현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보여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작사자이기도 한 안석주는 대중문화사에 잘 알려진 영화감독이자 시인, 소설가, 희곡 및 시나리오 작가, 화가,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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