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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26>硫黃島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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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26>硫黃島 전투

입력
2003.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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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19일 태평양전쟁 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오지마 전투가 시작됐다. 이오지마는 일본 도쿄도(東京都) 남쪽 해상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 중앙에 자리잡은 화산섬이다. 이 날 새벽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한 약 7만 명의 미군 해병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2만으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일본군은 본디 굴이 많은 스리바치산(摺鉢山)의 지형을 이용해 섬 곳곳에 지하 터널을 만들어놓았다. 게다가 토치카, 목조 요새, 대전차호(對戰車壕), 지뢰밭이 여기저기 있었다. 섬을 뒤덮고 있는 검은 모래 위로 중무기(重武器)를 나르는 일도 미군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은 일주일 만에 비행장과 스리바치산 정상을 장악했다. 그들은 이 사화산에 '혈장(血漿)'을 뜻하는 '플래즈머(Plasma)'라는별칭을 붙였다. 스리바치산을 빼앗느라 흘린 피를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미군은 이오지마를 공군 기지로 삼아 쉽사리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는 계속됐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섬 곳곳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탕작전'이 끝난 것은 6월 들어서였다. 섬을 지키던 일본군 2만 가운데 마지막 1인이 사살됐을 때, 미군은 이미 2만7천 명의 사망자를 낸 상태였다.

이오지마가 처음 일본 영토에 편입된 것은 1891년이다. 일본은 1944년 섬 주민을 강제로 몰아내고 군 기지를 세웠다. 1945년 전투 이후 미 공군기지로 사용되던 이오지마는 1968년 오가사와라 제도의 다른 섬들과 함께 일본에 반환되었다. 지금도 일본 자위대가 항공 기지로 사용하고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강제로 소개된 주민들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고 종 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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