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우리 문화 가운데 하나가 기록문화라고 생각한다. 그 대표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472년 간의 기록으로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실록은 공문서를 정리한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와 각종 일기·등록(謄錄), 사관의 사초(史草), 문집 등을 토대로 편찬되었다.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관이 회의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직필한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하고 또 완성된 후에는 없앴다.사관은 사초를 바탕으로 앞 임금 때 일어난 모든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고 때로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과감하게 비평하였다. 사관이 임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실록을 편찬할 수 있도록 임금은 전대의 실록을 전혀 볼 수 없도록 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많은 기록문화가 남아 있다.
다음 주면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한다. 5년 동안의 치적을 무엇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왕조시대처럼 퇴임에 맞추어 대통령실록을 편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통령과 그 각료 등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평가해야 한다.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 청와대는 지난달 10일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대통령 기록물 15만 8,000여 건을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하였다. 이 자료는 해방 이후 전임 대통령까지 모든 자료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데,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 50년 동안 대통령 기록물이 12만여 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단순히 건수로만 비교한다면 철저히 기록하였던 세종실록이나 성종실록에도 못 미친다.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기록은 너무나 엉성하다. 중앙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치단체나 공공기관도 정도의 차이일 뿐 거의 마찬가지다. 설계도면이 남아 있지 않아 지하철 1호선 환풍기 청소를 하는데 천장 전체를 다 뜯었다는 얘기도 있다.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같은 일을 거듭해야 한다는, 다시 말하면 전통이 만들어질 수 없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 기록이 없으면 드러난 사실 속에 숨겨진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미 IMF 구제금융 요청당사자를 두고 두 전직 부총리 사이에서 벌어진 설전(舌戰)에서 생생하게 확인했다. 우리는 "후대의 역사가 평가하리라"는 구호로 정치가 역사를 능욕하는 현장을 많이 겪었다. 모두 후대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권력도 기록의 울타리에 갇혀 비판을 받아야 한다.
기록보존과 이에 터잡아 국정 투명성을 더 높이기 위해 정부는 지난 2000년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공공기관에서 작성하는 기록물을 보존하고 관리에 노력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자치단체 등이 기록물관리기관을 세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정부기록보존소 등도 일반인이 접근하기엔 여전히 멀다. 기록에 다가가기 어려운 현실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진정한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기록보존은 공공기관만의 책무는 아니다. 기업, 사회단체, 대학, 개인 모두 기록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 선비들은 달력 여백 등에 지극히 사소한 일상생활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였고, 이것은 선인들의 삶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개인은커녕 정부기관 가운데 업무일지를 세밀하게 정리해 남기는 예는 많지 않다. 목숨을 걸고 기록을 지켜온 선인들의 정신은 저 먼 곳으로 사라졌다. 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는 국권만 잃은 것이 아니라 기록문화의 전통마저 빼앗겨 버렸다. 다시 우리의 찬란한 기록문화를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알찬 민주주의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
정 긍 식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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